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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민 Sep 02. 2020

아이의 복수

일상 이야기

3월과 4월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난생처음 개학 연기를 경험했다.

아이는 지루했고, 엄마는 답답했다.


그러다 생각했다. 약간의 선행학습은 도움이 되겠지?

다른 아이들도 다 놀고먹진 않을 것이다.

알음알음 학원을 보내고,

1학기 수업을 미리 진도 빼는 아이들 천지일 텐데.


학원을 보내기는 겁나니 나는 집에서 내가 직접 가르치리라.

야심 차게 '엄마표 교육'을 계획했다가

애를 잡을 뻔했던 경험을 브런치에 남기기도 했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 가르치지 않는다 라는

영상을 유튜브로 접하고 나서

 내가 얼마나 생각이 짧았는 지를 깨달았다.


남의 아이가 잘 못할 경우, 특히 학습적인 부분에서 부족할 경우

제삼자인 나는 '괜찮아, 그럴 수 있지.'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그 남의 아이가 내 자식이 되면

'그럴 수 없어.'가 되는 현실을 겪었다.

그럴 수 없는데 얘가 왜 이러나. 바보인가.

그러다 모진 말이 한 두 마디 나오더니

애를 집어삼킬 것 같은 말들이 봇물 터지듯  뚜둑 뚜둑 쏟아져 나왔다.


내가 심하게 몰아붙인다 생각할 때는 이미 너무 와 버렸다.

아이도, 나도 상처를 받은 후이다.




이런 경험으로 나는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1만 시간의 재발견>에서

 "아이는 각자 만의 시간이 있다. 받아들이는 데 천차만별이다."

라는 글귀 하나로 위안을 얻었다.


부모가 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나도 학부모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러다 나도 우리 아이에게 복수를 당했다.

보기 좋게.



두 번째 온라인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요즈음.

나와 아이는 하루 종일 붙어 지낸다.

행여나 코로나가 덤빌까 밖에 나가지는 못하고

사이좋게(?) 집에서 머무르고 있다.


최근에 읽은 <초집중>이란 책에서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준비하고, 기대하며

활동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아이와 엄마가 함께 활동하는 시간을 정해놓았다.

무엇을 할지, 고민하고 의견을 나눠 보다가

하루는 붓글씨를 쓰기로 했다.


마침 캘리 그라피를 배우느라 준비해둔

서예 붓, 화선지, 먹물, 벼루가 눈에 띄어

오늘 하루는 붓글씨를 쓰며 시간을 보내보자, 잘됐다.



아이는 제멋대로 휘갈겨 쓰며 만족해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좀 더 반듯하게 써봐. 붓을 눕히지 말고."

라는 말을 날려대는 '나'이다.


몇 번 써보지도 않은 붓글씨 마저 꼼꼼히 잘 쓰기를 바라는

'나'라는 엄마를 어쩌면 좋은가. 나는 불치병에 걸렸다.



엄마가 그러든 말든

제 딴에는 신나서 붓을 날려가며 글씨를 쓰다가

아이가 알고 있는 간단한 한자를 쓰기 시작했다.

  "엄마 이거 알아? 五"

  "다섯 오"

  "이건..?"

나에게 질문을 했다. 나는 척척 대답했다.

  "이건 뭐게? 王"

  ".............."

임금 王을 보고 바로 대답을 못했다.

글씨가 이상하고 다른 글자로 보이기도 해서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는 찰나에,

  "엄마! 이거 몰라? 어떻게 어른인데 이걸 몰라?

진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아휴 답답하다."

  "............ 뭐야? 너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너는 다 알아?"



아이의 몰아붙임, 무시하는 말투에 순간 '헉'하며 화를 냈다.

결국 붓글씨 쓰기는 끝났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했던 말들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뭔가 내 입에 '척'하고 달라붙는 느낌이다.

세상에,

내가 3월에 아이를 몰아붙이며 해댔던 말들이

아이 입에서 다시 살아나 나에게 날아왔다.



아이의 심정이 어땠을지, 그때는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내 미안함이 더 컸었지.

그러나 아이에게 당해보니 얼마나 제대로 비수와 같았는지를

이제야 맛보았다. 쓰디 쓰고, 뱉어버리고 싶은 그 말들.



앞으로 다시는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내가 겪어보니 말이다.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서는 격려와 칭찬이 가져다준 변화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개가 조금 나아지는 구석만 보여도 격려하고 칭찬하며

고기를 주고, 또 끝없이 되풀이해서 칭찬했다." 말 못 하는 동물에게도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칭찬인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교도소 소장으로 근무했던 로스는 "수감자들의 노력에 대해 적절하게 인정을

해 주는 것이 그들의 사소한 잘못에 대해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보다 그들의

협조를 얻었다."라는 사실을 알렸다.  

하나하나 지적해줘야만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가겠지?라는 나의 어쭙잖은 생각이 틀렸다.


크게 기뻐해야 할 변화들은 아주 작아 보이고

티끌만 한 실수들은 아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것 마냥 커 보였다.


이제는 작은 변화에 칭찬을 아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구구단을 외우는 아이의 노랫소리에

4X2=6이라는 외침에 순간 멈칫.




다행이다.

로봇 같은 말투이긴 했지만

  "4X2는 뭘까? 다시 해볼까? 열심히 노력하네."

라고 말해줬다. 갑자기 튀어나와야 하는 칭찬의 문장을

좀 외워두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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