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기 전엔 '결혼을 해야 하나'가 의문이었다면 결혼을 하고 나서는 '아이를 낳아야 할까'로 바뀌었다. 요즘 시대에 가족의 형태는 다양해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는 게 대세이니까. 한때는 딩크를 원했던 적도 있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좋아서 시작한 일이 아니었고 으레 '나는 아이 안 좋아해' 하고 생각했다. 신혼기간에 공부를 시작한 남편 덕분에 나는 일과 가사로 바빴고 아이 생각은 없었다. 미국에 도착해서는 미국 생활을 즐겨야지 무슨 임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난 너무 심심해지고 말아 버렸다.
남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미국 생활은 잔잔한 일상으로 가득했다. 나도 뭔가 몰두할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었다. 우스갯소리로 나도 애가 있으면 바빠지려나 말하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임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해 무지한 나는 덜컥 임신을 해버렸다. 그렇다. 나는 심심해서 임신을 했다.
임신 시도를 하고 5개월 동안 임신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 시도였다. 이번에 임신이 안되면 다음 해로 넘기자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가 봄에 태어나기를 원했다. 내 생일은 8월 중순이다. 여름방학이 생일이었기 때문에 학창 시절 내내 친구들과 생일 파티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새로운 기운이 샘솟는 봄이라는 계절이 아이의 생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나에겐 8월이 임신의 마지노선이었다. 그래야 봄에 태어날 테니까. 임신의 이유도 아이의 생일이 봄이길 바란 마음도 심플했다.
하와이 여행에 가서 찍은 아이의 태명
임신이 안된 줄 알고 가족여행을 계획했다. 9월에 부모님과 언니네 가족이 하와이에 간다고 했다.
'너도 올래?'
'그래'
9월이면 미국은 정규학기가 시작되는 달이다. 남편은 학교 수업을 듣고 바빠질 때라서 나는 혼자 하와이로 떠나기로 계획했다. 이전에 못했던 와이키키 비치에서 서핑도 배워보고 스포츠카를 렌트해 해변도로를 달릴 야무진 계획을 세웠다.
잔잔한 일상은 계속되었다. 자고 쉬고 친구를 만나 운동을 갔다. 이상하다. 많이 먹지 않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데 점점 배가 나오는 느낌이 커졌다. 생리를 할 때가 되었나? 왜 이렇게 배가 나오지. 친구와 특훈을 하자며 그날은 특별히 복근 만들기 부트캠프를 열심히 들었다. 수업을 다 듣기 전부터 온몸에 땀이 흘렀다. 헉헉거리며 지옥 같았던 50분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이제는 배가 좀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아뿔싸! 기분이 싸하다. 촉이 말한다. 집을 빠져나와 약국에 가서 임신테스트기를 사 왔다. 내일 해봐야지 하며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첫 소변이 제일 정확하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일어나자마자 테스트기를 들고 쓱 화장실로 들어갔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설명서에 나온 대로 몇 분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진한 두 줄이 보였다. 이게 뭐지? 분명 내가 원한 임신인데 기쁘고 반갑다는 마음보다는 황당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5개월 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는데 이게 이렇게 된다고? 철없이 당장 다음 달에 가는 하와이 여행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이를 원해서라기보다는 너무 심심해서 아이라도 있으면 괜찮을까 싶어 한 임신이라 그랬을까? 아이와의 첫인사에서 나의 반응이 이제 와서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다. 철도 없고 이기적인 엄마라 그때 내 반응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편에게 알렸다. 기뻐해줬다. 그리고 하와이 여행을 걱정해 주었다. 컨디션이 좋았기 때문에 여행은 무리 없이 다녀올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안녕히 잘 다녀오라는 의미로 태명을 하와이 인사말에서 따와 '로하'로 지었다.
주변에 한 명이라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를 가까이서 보고 임신, 출산, 육아가 이렇게나 힘들고 고생스러운 길인 줄 알았다면 이런 무모한 결정을 내렸을까 싶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힘든 줄 알았으면 쉽게 아이를 낳겠다는 생각을 못했을 정도로 나는 걱정이 심한 편이니까. 꽂히면 일단 저질러보는 나에게 맞는 탁월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 때문이었을까. 임신은 쉬웠지만 나는 고위험 산모로 임신기간을 보냈고 출산 과정도 누구 못지않게 험난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장난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삼신할머니의 회초리 한 대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 이유로 나는 지금의 아이와 만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초음파를 자주 볼 수도 없고 한국에서는 흔한 입체 초음파도 흔하지 않다.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아이의 얼굴이 궁금해서 일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평생을 궁금했던 아이는 나를 많이 닮았다. 내년이면 초등학교를 가는 아이를 보면 아직도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