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 청옥산 가을산행기
눈을 떴다!
주방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분주함에도 게으름을 더 부리고 싶은 아침이다.
수 일전 아내는 테니스연습 중에 발목이 삐었다. 그래서 오늘은 혼자 산행에 참여해야 한다.
아내와 함께 할 수 없다는 허전함 만큼 게으름이 나를 붙잡아 두고 있다.
나의 게으름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도시락 반찬을 준비하는데 정성을 다하고 있다.
스팸계란부침, 꼴뚜기조림, 겉절이김치...
세 가지 모두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다. 특히, 스팸계란부침은 어릴 적 부잣집 아들레미가 싸 온 소시지부침에 군침을 흘린 추억이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좋아하는 메뉴이다.
얼른 일어나야 한다. 행여 삐지기라도 하면 많이 곤란하다.
가끔 동네 뒷산 정도를 함께 오갔던 우리가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게 된 것은 순전히 아내의 선택 때문이었다.
아내는 2014년 어느 날에 친구와 산악회를 이용하여 춘천에 있는 삼악산을 다녀온 이후에 산악회활동을 나에게 권유했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일반적으로 산악회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않았고, 나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무조건 반대하기보다는 함께 동네산 산행부터 하면서 알아보기로 했는데, 동네 뒷산인 광교산의 한 쉼터에 붙어있던 우리 산악회 산행안내지를 발견하고 산악회 등산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산에는 여러 산악회의 안내지가 붙어있었지만 집 근처에서 출발하고, 매월 두 번의 정기산행이라 무리가 되지 않을 것이고, 토요산행이라 일요일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점이 선택의 이유였다. 이 선택은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바꿔놓았다. (이 이야기는 자세히 다룰 시간이 필요하다.)
선입견을 해소하는 데에는 직접 경험해보는 것이 좋다는 판단과 어떤 활동이든 부부가 함께 한다면 문제가 없다는 생각도 작용하였다. (산악회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도 나중에 따로 다뤄야 되지 싶다.)
가벼운 산행이라도 아내와 함께 하지 않는 산행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 산행 보다 더 재미있는 활동을 많이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친구들과 하는 산행은 예외다)
서둘러야 한다. 오늘도 3-4시간 버스를 타고 가야 도착하는 곳이다.
게으름을 피운 시간만큼 기상도 늦었다.
서둘러~ 난달!
버스가 힘차게 달리고 있다.
창 밖으로 여름날 긴 햇살에 익어서 성질이 변한 황금빛 잔상들이 단풍의 계절을 느낄 수 있도록 스쳐지나간다.
어제의 뉴스에서 설악산의 단풍이 절정이라 했었다. 그런데 우리는 설악산과 반대로 달리고 있나?
왜?
등산에 대한 경험이 조금만 풍부한 사람들이면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단풍으로 유명한 곳은 인산인해로 단풍을 즐기는 보다는 가을의 경치를 즐기러 나온 상추객(爽秋客)에 치여서 산행 자체가 힘들 것이거니와 막힌 길에서 보낸 피곤함으로 주말의 행복감을 망칠 수 있다.
특히, 주말에는 산에도 도로에도 사람들로 꽉 꽉 들어차있다. 밀리는 도로 위의 차 안에 있는 것은 산에 오르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지만 유명 단풍지 못지않은 가을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경북 봉화군에 위치한 청옥산으로 가고 있다. 4년 전에도 같은 이유로 청옥산 산행을 했었다.
설악산, 오대산의 단풍보다는 못했지만 충분히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멋진 풍경을 제공해 주었던 기억이 이마를 간지럽힌다.
산대장님을 대신한 명예회장님의 산행설명에서도 2019년의 청옥산 산행에 대해서 회원들께 안내해 주신다. 그리고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 아직 단풍이 봉화까지 남하하지 못한 듯하다는 걱정스러운 한마디도 더 보태주셨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계속 행~ 진!
도착했다.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몸을 풀며 준비하고 있는 회원들을 뒤로하고 안내표지판으로 향했다.
산행기를 쓰고부터는 안내표지판을 소홀하게 보지 않는다. 안내에는 "청옥산명품숲" 자랑으로 시작한다.
산림청 개청 50주년 2017년에 명품숲으로 지정되었고, 우리가 걷게 될 정상까지의 구간이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 숲길로 선정되었다니 자랑할 만하다.
이제부터 확인 들어간다.
억새와 단풍나무가 병풍을 세우고 있는 숲길을 따라 올라가니 숲해설가의 집이 나오고 해설가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남녀 두 분이 우리를 반가이 맞아준다.
4년 전의 그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고장을 찾아준 방문객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는 말과 표정해서 친근함을 느끼게 했다. 방문기록을 슬쩍 흘겨보니 몇 줄 되지 않는 기록이 방문객들이 많지 않은 오지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초입에서 숲길과 임도로 나누어져 있다.
숲길을 들어서니 커다란 화폭에 신인상파화가들이 팔레트에 짜 놓은 노랑, 오렌지, 빨강 물감을 섞어가며 붓으로 점묘해 놓은 듯 그림 같은 활엽수림 단풍길이 펼쳐져있다.
먼저 걸어 들어간 일행들이 그림 속의 묘사된 인물처럼 동화되어 보였다.
경사가 완만하여 풍경을 감상하며 사색하기 좋은 길이라 조금 천천히 걷고 싶었지만, 오늘 계획된 산행거리가 만만치 않아서 일단 바쁘게 걸어야 한다. 걸으면서 나는 바쁘게 폰 카메라에 이 풍경을 담아야 했다.
산행기를 쓸 때 이 장면을 기억에서 고스란히 떠 올려서 표현하고 싶었다. 산행기를 쓰고 있는 지금! 그때의 감정을 살리려고 이미지를 펼쳐놓았는데, 그 아름다운 장면들을 글로 표현하는 데에는 아직 나의 표현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하늘에서 뭔가 떨어져 볼에 닿았는데 차갑다.
눈이다. 벌써?
진눈깨비 몇 개 떨어지고 말겠지 했는데 많은 양은 아니지만 않지만 어지럽게 그려진 나뭇가지를 피하며 날리어 온다.
오르는 길이 완만하여 이곳이 1,000 고지가 넘는 곳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태백산 자락의 산간오지인 이곳이 도심보다 최소한 8도 정도는 낮은 온도라서 이상하지 않은 현상인데, 갑작스러운 첫눈에 살짝 당황했다고 해야 하나?
돌아오는 버스에서 첫눈을 검색해 보니 오늘이 강원도 태백산국립공원에 내린 첫눈이 내린 날이었다.
그 첫눈을 직접 경험한 것이다.
낙엽 덮인 통나무다리를 몇 개를 건너서 단풍나무 섞인 활엽수길이 끝날 즈음에 계곡 옆으로 넓은 잣나무 숲이 나왔다.
명상쉼터!
피트니스에서 관리를 잘 받은 여인같이 군살 없는 날씬한 몸매의 잣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서 빼곡히 들어서 있고, 너른 바닥에는 아내의 어린 시절 바람 부는 날 새벽에 쟁탈을 벌였다는 불쏘시개용 갈비(잣나무낙엽)들이 방문자들의 발걸음을 푹신하게 받아준다.
발걸음이 찍히는 깊이가 느껴질 정도로 푹신푹신함이 기분을 좋게 했다.
당장 배낭을 내려놓고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디라도 앉아서 명상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은 피톤치드로 가득 찬 맑고 시원한 공기를 깊은 호흡으로 폐까지 밀어 넣으며 몸속에 가득 찬 오염된 도심의 찌꺼기를 정화시켰다.
온몸 구석구석 깨끗하고 맑은 공기를 밀어 넣고 싶었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긴 호흡 몇 번과 잠깐의 멍 때림으로 명상을 대신하고 훗날을 기약해 본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실현이 가능할까?
명상쉼터에서 다시 정상까지 난 숲길에 내려섰다. 계절에 맞게 변심한 활엽수길을 조금 더 걷다 보니
여름날 키워낸 이파리들이 힘에 겨워서 인지 일찍 감치 다 털어내고 귀족부인의 하얀빛 빌로도 긴치마를 입은 듯 껍질을 반짝이며 서 있는 자작나무 숲이 나왔다.
그동안 자작나무 아래에서의 순간은 정적인 아름다움과 내면에 조용하게 울리는 특별한 느낌을 주었었다. 아직은 숲을 조성한 지 그리 되지 않아서 인지 그런 느낌보다는 숲의 다양성을 채우는 정도인 듯하다.
모자람은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과 함께 한 이들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할 뿐이었다.
시간이 좀 더 흘러서 숲이 좀 더 성숙해지면 원대리 자작나무숲 못지않은 힐링공간으로 변하기를 빌어본다.
이번에는 잣나무숲길이 나왔다.
명상쉼터의 넓은 공간을 길게 재구성해놓은 것 같았다. 길도 편안하고 잣나무잎들이 깔려서 걸으면서 사색할 수 있는 좋은 길이다.
명상쉼터에서 시간을 보내지 못한 방문자들을 배려한 것인지 군데군데 통나무 의자들도 놓여 있다.
잣나무숲길에서 명상쉼터의 아쉬움이 가실 무렵 다시 표지판이 있는 쉼터가 나온다.
정상까지 400미터 남았다. 오르는 계단이 살짝 가파르다. 400미터쯤이야
통나무를 잘라 만들어놓은 계단이 올여름 내린 비에 밑동을 내어 놓아서 밟는 계단이 아니라 넘는 계단이 되어있다.
첫눈 발견!
나무틈에서 녹지 않고 남아 있는 첫눈의 흔적을 발견했다.
별것 아닌 것에도 흥이 남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살짝 웃음이 나왔다.
평소 내리는 눈을 보면서 출근길 정체를 걱정하고, 세차걱정과 미끄럼에 부상을 걱정하는 나이가 된 것인데, 첫눈의 흔적만큼 낭만이 조금은 남아 있나 보다.
정상이다.
바람이 무척 거세다. 건너편 태백능선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만만찮다. 머리 위로 추풍에 떨어진 낙엽들이 활공하고 있다.
정상너머 태백준령들의 위엄과 신령함이 거센 바람에 실려 날아오고 있는 듯하다.
청옥산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이 세 개나 있다.
화강암으로 미끈하게 가공된 인공미 넘치는 표지석 하나!
화강암으로 조금 투박하게 가공된 자연미가 조금 있는 표지석 하나!
가장 뒤쪽에 나무를 깎아서 길쭉하게 세워 놓은 표지석 하나!
각 각의 표지석 아래에는 제단이 만들어져 있다.
태백의 신령함으로 산악회의 안전과 번영을 기원하기에는 적합하다는 산악인이 많이 찾는 까닭이겠지?
그건 그렇고 밥 먹을 자리를 찾아야 한다.
집에서든 산에서든 밥 먹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하다. 특히, 퇴근하면서 가볍게 장을 본 다음,
아내와 함께 그날 하루를 정리하면서 막걸리 한 병을 곁들인 저녁은 임금님의 수라상이 부럽지 않다.
어느 실패한 정치인의 대권 슬로건으로 사용되었던 “저녁이 있는 삶”을 나는 매일 누리고 산다.
슬로건만큼은 대통령감이다.
태백산 방향으로 내려서니 바람이 엄청나다. 식사자리를 다시 찾을 것도 없이 정상부근에서 헬기착륙장에서 먹고 가야 한다.
올라올 때 그 자리를 봐 두었었다. 그리고 아직 등산학교 테니스부 회원들이 정상까지 도달하지 못하여 서둘로 헬기착륙장으로 향했다.
자리를 잡고 보니 허전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내도 없고, 테니스부 컨트롤타워 장군형수도 없다.
컨트롤타워가 없으니 일사불란하지가 않다. 서둘러 펼친 자리에서 빈객도 찾아들었고, 테니스부원들이 늦게 도착해서 시간상의 밸런스는 다소 깨졌지만, 평소에 닦아 놓은 스타일대로 서로 챙겨주며 식사를 마쳤다. 재난대피훈련이 이래서 필요하다.
오늘의 스페셜은 경식형님의 와인으로 꼽아야겠다. 테니스부인 만큼 클럽 추계대회 1등 상을 가져오셔서 남자는 주로 레드와인, 여자들은 주로 화이트와인으로 점심식사의 즐거움을 풍성하게 한 공로이다.(참고로 우리 산악회는 평소에 레포츠 및 취미활동으로 댄스, 탁구, 테니스 레포츠활동을 하다가 주말에 산행에 참가하는 분이 많아서 편리상 테니스부로 표현하였다.)
청옥산 정상을 지난 능선에서 바로 본 먼 풍경이 태백의 갈래답게 겹겹이 펼쳐져서 두텁고 웅장하다. 떨어진 낙엽들이 길을 덮어서 분간하기 힘든 산길을 가도 가도 하산 지점이 나오지 않는다. 중간에 만난 쓰러진 방향 표지목이 판단을 헛갈리게 한다. 길을 잘 못 들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면서 능선길을 타고 걸었다.
산행하면서 우리말 고는 다른 등산객을 한 명도 보지 못한 것을 보니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이 능선을 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 산행이 처음이라는 탁구부회원 두 명을 포함하여 8명의 선두에서 내려오는 길이라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 방향표지목이 보인다.
발견!
백천계곡 하산지점이다. 안심이다. 작은 무리를 이끌며 행여 딴 길로 들어서지나 않을까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걸었는지? 산행대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이제 이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백천계곡을 만나게 된다.
계곡을 따라 졸졸졸 따라내려가니 4년 전 아내와 예쁜 단풍을 만나서 놀던 곳이 나왔다. 살짝 실망이다.
화려했던 그때의 단풍색이 빛이 많이 바랬다. 왜지? 올해는 여름, 가을 내가 유난히 많더니 물이 다 빠져버렸나?
그때는 둘이서 설악산 못지않는 단풍을 배경으로 닭살 돋는 사진도 찍고, 돌탑도 쌓으며 소원도 빌었었다. 그때 나는 무슨 소원을 빌었었지? 아내는 돌탑을 쌓으면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소원을 빌었었다면 내 소원은 아마도 "가족의 건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원을 좀 더 보탠다면 "돈이 조금만 더 있으면 좋겠다"였을 것이다. 지금도 그때와 소원은 같은데 아내와 함께 하지 않아서인지 재미가 좀 없다. 그래서인지 하산길이 너무 길고 지겹다.
내려오니 마을축제 한창이다. 파장인지 사회자가 경품추첨을 하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이 말을 탄 국립공원관리대원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태백산자락에서 말 탄 대원들을 보니 신기하다. 나도, 함께 내려온 조서방도 빠질 수 없다.
기념촬영을 끝내고 조서방과 먹거리장터에서 막걸리와 메밀 전을 시켜서 먹거리체험을 했다.
역시 나는 방앗간을 지날 칠 수 없는 참새다. 조서방도...
둥지에 있을 애인 참새에게 맛을 보여줄 요량으로 두 마리 참새는 한 병씩 배낭에 쑤셔 넣고, 함께 한 추억도 쑤셔 넣고, 다음 산행기약도 쑤셔 넣고 버스로 향했다.
이제 재 너머에 기가 막힌 뒤풀이 약수탕을 먹으러 가야지(가수 송창식의 "참새의 하루" 노래의 운율로)
이것으로 그녀를 집에 두고 온 외로운 참새의 산행기를 마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