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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틸다 하나씨 May 30. 2024

브론즈 한 방울

= 천 개의 땀방울



조용히 미술관을 함께 둘러보던 막내아들이

복도를 조금 앞서 걷고 있었어요.



갑자기 호들갑스러운 “엄마~~” 소리가

고요하던 미술관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게 합니다.

큰 목소리에 주위를 먼저 살피다가

“왜?”하고 입모양만 뻥긋했더니

빨리 와보라는 손짓에 속도를 높여 다가가 보았습니다.


[Lão dân quân Hoằng Trường ] 1969, Bronze, 129.5*40*32cm


“벤츠만든 사람이야! “


“푸하하하”

조용히 하려던 저까지 참지 못할 웃음이 터져 나와 버렸어요.

"아니, 그 사람이 베트남에 있었던 거 엄마는 알았었어? 난 진짜 몰랐네. “


Lê Dình Quỳ(레 딘 꾸이) 작가의 Old militiaman of Hoằng Trường (호앙 쯔엉 지방의 늙은 민병대원)이 벤츠 창시자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녀석의 재치 있는 농담에 배를 잡고 웃다가 집에 돌아왔어요.  

지금도 한 번씩 생각날 때면 서로 바라보며 키득키득거린답니다.






지난 화에서 소개드린 목각 조형은 통나무 덩어리를 깎아내면서 형태를 만들어 낸 마이너스 기법의 조각(彫刻, carving)이었다면, 오늘 소개해 드리는 브론즈 동상들은 미리 주조한 몰드에 고온에서 녹인 청동을 부어 식혀, 형상을 더해가며 이루어내는 플러스 기법의 소조(塑造, modeling)랍니다. 



동상을 마주하는 때면

조소예술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섬세하게 담은 표현력과 완벽한 비율에 먼저

감동이 일어납니다.

그에 더해

예술가가 빚은 흙덩이가 청동상이 되어 천년을 살아가게 하는

주물공(鑄物工)들의 정성과 집념에까지 생각이 닿게 되면,

천 개의 땀방울과도 같은 브론즈 한 방울이 얼마나 귀하게 녹아있는지 보이게 되고

비로소, 조형물들은 신비롭기 그지없게 됩니다.


[Anh Nguyễn Văn Trỗi]1973, Bronze 150*46*78cm


호찌민 문학 예술상을 수상한 Nguyễn Hải (응우옌 하이) 작가의

Anh Nguyễn Văn Trỗi(응우옌 반 쪼이) 열사 동상입니다.


응우옌 반 쪼이 열사의 동상은 그가 사이공 Chí Hòa(치 호아) 수용소에서 순국한 지 9년 만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9년이 지나 천 년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동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는 일은 후손이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귀한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동상을 통해 각 나라의 민족들은 잊지 말아야 할 열사와 영웅들을 가슴속에 깊이 새기게 되니까요.


붉은 금빛에 가까운 청동상인 이 작품은 구조 예술의 경향을 짙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윤기 나는 표면의 표현력과 하나하나의 선에 이야기를 그어 둔 작가의 영리한 구도가 미적 가치를 완성하고 보는 이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아 버리는 작품이죠.


미간을 찌푸려 힘을 준 눈매와 굳게 다문 입매는 '올곧음' 그 자체를 표방해 내고 있습니다. 누구 와도 타협하지 않을 듯한 성정이 그의 단단한 걸음에도 담겨 있습니다. 가장 짠하게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팔과 가슴을 결박하며 깊게 파인 밧줄의 모양이 묘사된 지점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가 묶여 있었을지 추측하게 하는 선명한 자국입니다. 밧줄로 결박된 팔과 의지가 가득 담긴 눈빛이 상부에서 매치되면서 첫눈의 앵글 안에 먼저 들어오도록 구도화한, 너무나 섬세하게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이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아래로 시선이 내려가면서 곧 깨닫게 되죠.


그럼에도 그의 발은

힘 있게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요!






[Vót Chông]1967, Bronze 77.5*88*45.5cm


2012년 문학예술 부문 정부 상을 수상한 Pham Mươi (팜 므어이) 예술가의 작품

[Vót Chông]'창 끝을 날카롭게 갈고 있는 소녀'입니다.


1960년대 베트남 현대 조각에 색다른 시각을 가져다준 작품입니다.

이 동상은 무엇보다 진지하며 무엇보다 아픈 이야기를 담고서 60년대 말기의 아름다운 상징이 되었습니다.

곱게 빗어 넘긴 머리칼부터 하늘거리는 바지 매무새까지 연결된 부드러운 곡선은 그녀의 라인 위에서 여성성을 극대화 시켜줍니다.

하지만 보이는 부드러움과 달리 한 손에 들려진 날카로운 창에 시선이 멈추면

반전을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1930년대 베트남의 소수부족의 하나인 에데족에 Mô Lô Y Choi/Clavi(모 로 이 초이 혹은 클라비라 불리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시 중 "Cô gái vót chông" (꼬 가이 봇 총/ 창을 갈고 있는 소녀)라는 시가 유명합니다.

바로 이 동상의 모티브가 된 시랍니다.


                    CÔ GÁI VÓT CHÔNG

                        Mô-lô Y-cla-vi


Tiếng ai hát dưới đêm trăng tròn?
Cô gái sông Ba đầu búi tóc thon
Tay vót chông miệng hát không nghỉ
Như bao cô gái ở trên non
Ai nhanh tay vót bằng tay em? Chim hót không hay bằng em hát ru em
Mỗi mũi chông em vót cắm sâu xuống đất
Lũ giặc Mỹ lao vào là chết queo
Còn giặc Mỹ cọp beo
Lũ làng chưa yên bụng phát nương hát hò
Em chưa ngừng tay vót chông rào buôn rẫy
Bọn giặc Mỹ chạy rồi, tre rừng ta làm nhà, làm chòi cao
Chân ta đi chưa nghỉ, trời chưa xanh
Buôn làng ta nhà chưa dài thêm tranh
Em vót nhiều chông làm cạm bẫy
Đuổi Kơ-sóc Mỹ xuống biển xanh
Đất nước ta mới liền nhau
Em chặt tre làm đinh hót, đinh năm
Quanh lửa hồng em vui nhảy múa
Đón Awa Hồ vô Nam cùng uống rượu cần.

                       


창을 갈고 있는 소녀


누가 노래를 부르나, 보름달 아래에서

손톱이 가느다란, 머리를 묶은 바(Ba) 강가의 소녀

손으로 창을 깎고, 입으로 노래를 멈추지 않네

산 위의 많은 소녀들 중 누가 그녀보다 빨리 창을 깎을 수 있을까?

새들의 노랫소리도 그녀의 자장가보다 아름답지 않네

그녀가 깎은 창의 끝은 땅 속 깊이 박히어

미국 적들이 달려들었다가는 죽음이 기다리네

미국 적들은 호랑이와 표범 같아서

마을 사람들은 마음을 놓지 못하고 밭을 일구며 노래하네

그녀는 마을과 밭을 지키기 위해

창을 깎는 손을 멈추지 않네

미국 적들이 도망가고,

우리는 숲의 대나무로 집을 짓고 높은 누각을 짓네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하늘이 아직 푸르지 않으며

우리 마을의 집들은 아직 지붕을 덮지 못한 곳이 여럿이라네

그녀는 많은 창을 깎아 덫을 만들고

미국 적들을 푸른 바다로 쫓아내네

우리나라가 하나가 되면 그녀는 대나무로 못을 만들고,

모닥불가에서 춤을 추며 즐거워하네

아와호를 맞이하며 남쪽으로 함께 가서 술을 마시네.


날카로운 창 끝만큼

아픈 시입니다.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쉼 없이 창 끝을 갈고

마침내 미국 적들을 푸른 바다로 쫓아낸 그녀.  

그녀의 용기와 헌신은 마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창을 갈며 부르는 그녀의 노래는 마을 곳곳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세대를 거쳐 전해지며,

그녀가 깎은 창은 베트남의 보호와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상이 되었습니다.







[Vân dại]1973, Bronze, 120.3*48.5*42cm


Lê Công Thanh (레 꽁 타잉 ) 작가의 Vân Dại (반 자이) 동상입니다.


그녀는 Áo tứ thân (아오 뚜 탄)이라는 의상을 입고 손에 부채를 들고 민속춤을 추고 있습니다.

웨이브 진 풍성한 머리칼을 예쁜 핀으로 반 묶음하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사선으로 고갯짓을 하는 그녀의 귀염스런 제스처는 마치 서구의 여인인 듯 보이기도 하고 우아하고 평온해 보이기도 하는 첫인상을 줍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도 반전을 담은 '비극의 여인' 아이콘이었다니요.


Xúy Vân Giả Dại(쉬반 자 자이) 줄여서 Vân Dại (반 자이)라고 부르는 이 여인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중국의 황하 문명처럼 고대 문명이나 사회에서 특정 장소나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를 의미하는 고대처소화(古代處所化)라 일컬어지는 10세기 딘 왕조의 전통 연극 예술 형태의 '쩌우'(Chèo, 베트남 전통 연극 형태)인 'Kim Nham'(낌 남)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쩌우는 비유적이고 서정적인 이야기를 담는 방식이 특징인 고대 연극의 한 형태로 현대 베트남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예술 형태입니다. 비극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고 풍자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인 'Kim Nham'(낌남)은 뛰어난 연기자들의 공연 덕분에도 유명해진 씬들이 많이 남아 회자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가족과 부부가 갖추어야 할 도덕관념을 표현하고, 베트남 고대 마을 사회의 문화를 보여주며, 여성의 품성을 중시하고 엄격하게 평가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옛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동정심을 드러내고도 있습니다.


Kim Nham'(낌남)이 Xúy Vân(쉬반)과 결혼한 직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수도로 떠났고, 외로웠던 Xúy Vân(쉬반)은 Trần Phương(찬 프엉)이란 남자에게 유혹되게 되는데 제정신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비난에 일부러 미친 척을 하며 그를 따라다닙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이내 들통나고 Kim Nham은 아내를 쫓아냅니다. 이후 Trần Phương을 다시 찾아가지만 그는 그녀를 배신합니다. 결국 가짜로 미친 척하던 그녀는 진짜로 미치게 됩니다. 그녀는 구정권 속에서 여성들의 가혹한 생활과 사랑에 대한 욕망 그리고 행복 사이에서 격렬히 몸부림쳤던 비극적 운명의 화신입니다. 


스토리를 알고 나서 그녀를 다시 바라보니 행복하고 애교 넘쳐 보이던 그녀가 갑자기 슬퍼 보이는 것이...

제가 참 편향된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답니다.

보이는 것으로는 다 알 수 없다는 진리를

또 한 번 가슴에 눌러 담고 떠납니다.






[Cô Gai Quan Họ] Bronze


베트남 전통 모자를 쓴 여성이

도도한 손짓과 기품 있는 표정으로 인사합니다.

"Xin Chào Việt Nam" (신짜오 비엣남)


목례로 화답하고 비에 촉촉이 젖은 잔디 위로 햇살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박물관 앞마당을 나섭니다.


The Vietnam National Fine Arts Museum


 




지난 화(목각 조형이 품은 온기) 글에 댓글을 남겨주셨던 @상처 입은 치유자 작가님께서 예전에 읽으셨다는 멋진 책 구절 하나를 소개해 주셨었는데 일주일 내내 그 말이 마음에 남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피에타(Pietà) 석조상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끌어안고 Pietà(비탄)에 잠긴 성모마리아의 모습을 조각한 작품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 예술 중 명작 중의 명작이지요.



미켈란젤로에게 어떻게 피에타 같은 작품을 조각할 수 있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길을 걸어가는데

버려진 돌덩이에서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리길래

그냥 돌을 주워와서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던 돌을 깎아냈을 뿐이라고.


작품만큼 위대한 예술가의 답변이 아니련가요.



이렇게 위대한 작품 피에타(Pietà)가 정신질환자였던 한 남자의 망치질 난동에 의해 성모 마리아의 손과 코가 깨져 나가는 등 큰 훼손을 입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등허리의 돌을 떼어와 코와 망가진 부위를 복원해야 했었다고 하죠. 그 작품이 만약 청동으로 주물 되었었더라면 그보다는 더 견고하게 보존되고 피해도 적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던 것에 격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목각상도 석상도 다 그만의 대단한 매력을 갖고 있지만 이렇게 훼손의 소식이 들려올 때면 늘 청동 조각상의 보존력에 더 의지를 하고 싶어 집니다.






오늘 작품을 둘러보는 동안

각각의 동상이 모두 Bronze로 표기되어 있는데 색이 모두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붉은 금빛, 검푸른 흙빛, 짙은 청동빛...

재료가 다른 걸까 혹시 궁금하실까 봐 마지막으로 잠시 알려드리고 갈게요.

청동(Bronze)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데 이에 아연과 인 등을 배합시킨 재료입니다. 이 혼합 재료를 1300도의 고온에서 용해시켜 동상의 몰드 사이의 공간에 부어 식히게 되는데 재료의 배합비율에 따라 용해된 청동의 색이 달라진답니다. 동상의 굳기와 색은 그중에서도 주석의 비율로 결정됩니다. 이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동상을 완성한 후에도 불로 다시 한번 단련을 하게 되는데, 얼만큼 단련했느냐에 따라 검푸른 구릿빛 혹은 광택이 나기도 하고 붉은 금빛이 나기도 하기에 작가가 원하는 농도의 색감을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동상도 완성된 순간부터 나이를 먹습니다.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세월만큼 더 멋진 색감으로 늙어가는 신비로운 재료이지요.


브론즈 동상 만드는 과정도 너무 흥미로워요.

하나의 조형물이 태어나기 위해 100가지도 넘는 공정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렇게 해야만 완성되는 동상에는 얼마나 큰 수고로움과 정성이 집약되는지...

천도 이상의 고온을 견뎌가며 만들어지는 것을 기억한다면

또 그 엄청난 온도를 다루는 과정이 사람의 손으로 직접 이루어지는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길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예술 조형물 하나하나가 결코 예사로이 보이지 않게 되죠.

유튜브에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 제작부터 극한 직업에서 소개된 동상 제작과정에 대한 많은 영상들이 있는데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참고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래에 첨부해 드리는 영상에서는 로스트 왁스 주조법(사형 주조법)으로 작은 두더지 형상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The Lost Wax Mathod는 고대부터 사용되어 온 정밀한 금속 주조 기법입니다. 이 방법은 주로 청동, 은, 금과 같은 금속 조각을 만드는 데 사용됩니다. 영상을 보다보면 한 과정 과정마다 얼마나 많은 노력이 담기는지 알게 됩니다. 하물며 이 작은 형상물도 신기한데 큰 동상을 하나 제작할 때에는 브론즈 한 방울에 얼마나 많은 수고의 방울들이 맺히게 될까요? 물론 요즘에는 3D기법으로 아주 빠르게 조형물을 제작하기도 하지만 손쉽게 구현되고 무제한 복제되는 작품에는 감흥 따위는 깃들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예술가의 영역은 곧 장인의 정신과 노력의 집약체가 만난 모든 것이니까요.



천년을 울리게 하는 힘은
셀 수 없는 땀방울 값입니다.



https://youtu.be/fE89prCzK2E?si=VGMEicI4VN1y4jO8


https://youtube.com/watch?v=ZrkMzVfBhu0&si=vYaqOnXoeQN3NG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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