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틸다 하나씨 May 16. 2024

유엔 우표가 된 화가의 ‘사랑’

라커와 칠보의 향연 그리고 소


저 멀리 사라져 간 섭섭한 낭만은

 "우표 수집"이 아닐까요?


어릴 적 저는 워렌 버핏이었습니다.

세계 각국 우표의 톱니 모양을 도로록~ 뜯어 내어 스크랩 북에 붙일 때면

마음에 차올랐던 '그 부유함'의 감정!

페이지를 넘고 넘어 끝없이 채워진 우표들을 만끽하던 그 만족감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어린 소녀에게 그 어느 예술가의 작품 보다도 멋졌던 우표의 색감, 

아주 얇고 살짝 거친 나무칩을 만지는 듯했던 조그만 네모 종이의 질감! 

우체국 스탬프 자국이 반쯤 걸쳐 찍혀 있으면 빈티지해서 멋졌었고, 흠 없는 새 우표를 구하면 그게 또 그렇게 귀해서 행복했고... 저에게 우표 한 장 한 장은 백만 원권 수표 한 장씩을 붙여 놓는 것보다 더 큰 부의 의식을 안겨주었었으니까요. 지금 제 스크랩북에 세계의 수표가 잔뜩 붙여져 있다 해도 그 시절의 그 부유했던 낭만과는 결코 맞바꿀 수 없을 것 같아요. 사촌 동생과 한번씩 만나 각자 모은 우표의 새로운 모양과 개수로 경쟁하며 울고 웃던 그날들이 그리워집니다.


제 마음속 국보 '세계 우표 스크랩북'도 기억의 저편에 머물러 있을 때에

어느 신문 기사를 읽다가 가슴속에 콕 박혀있던 하나의 단어가 톡, 꺼내져 바닥으로 도르르 구릅니다.

'UN우표'

‘우표’라는 말에 무조건 궁금해진 화가입니다.


2001년 베트남 화가 Thành Chương (타잉 츠엉)의 작품 '사랑'이 국제연합(UN)에 의해 국제 자원봉사 해의 상징으로 선정되었습니다. UN 우표에 인쇄된 첫 번째 아시아 화가가 되어 그의 작품이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모든 시대의 50대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며 개인적인 성취와 사회 및 커뮤니티 발전에 대한 혁신적인 기여를 인정받으며 베트남 언론, 타임스, 뉴욕 타임스, NHK 텔레비전, CNN 및 텔레그래프에도 소개되었습니다.


'UN우표'는 유엔이 전 세계에 자신의 존재감과 목적을 알리기 위해 발행하는 특별한 우표이기에 명목을 유지하고 있나 봅니다.
우표 하나하나가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유엔은 전 세계가 직면한 도전과 성취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합니다. 유엔 우표의 주제는 매우 다양한데 국제 평화부터 인권, 환경 보호, 세계 유산, 건강, 과학 및 기술에 이르기까지 유엔이 추구하는 다양한 이념과 이상을 반영합니다. 이러한 우표들은 단순한 우편 서비스의 목적을 넘어서, 교육적 가치와 함께 세계 곳곳에 유엔의 메시지를 전파하며 세계적인 이슈와 유엔의 활동, 인류의 공통된 목표와 꿈을 공유하는 강력한 매체라고 전합니다.


아시아 화가 중 최초로

UN 우표에 작품이 인쇄되었다는

베트남 화가 Thành Chương (타잉 츠엉)의 작품을 보여드릴게요.


2001. 자원봉사자의 해 기념우표 (Nguyen Thanh Chuong 응우옌 타잉 츠엉의 작품)


하트와 두 손 문양,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으세요? 자원봉사 단체의 티셔츠나 엽서에 많이 인쇄되었던 디자인이죠. 저도 그때는 보면서도 이것이 베트남 작가의 것인지 몰랐었네요.


Thành Chương (타잉 츠엉)은 1949년 베트남 박닌성의 예술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베트남 작가 협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인 유명한 작가 김란입니다(가끔 한국 이름 같은 베트남 이름도 있답니다. 족보 어딘가 한국인 조상이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일곱 살 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여겨졌다고 해요. 세계 각국의 미술 대회에 참가하며 많은 수상을 했고, 특히 1957년 런던 대회에서 그의 그림 '도이 가 토'로 금메달을 수상했습니다. 1960년에는 베트남 미술 연구소의 영재반에 입학하게 되는데 그의 첫 미술 선생님은 응우옌 상, 부이 쑤언 파이, 응우옌 투 늄과 같은 베트남 미술계의 주요 인물들이었다고 해요.



이제부터 이 작가의 실제 작품들을 감상해 볼게요.


Love, 2023 Lacquer on wood 27 3/5 × 21 7/10 in | 70 × 55 cm


남자가 백허그를 해주면 여자는 얼굴을 돌려 서로의 얼굴을 맞대고…

비로소 닿은 반쪽의 얼굴이 (곧 그의 정체성이) 선명해진다는 저 찡한 표현력…

수줍게 모은 여자의 발에서 더 가슴 떨려오는

'사랑'이네요.


기사에는 그의 작품 '사랑'이 우표에 채택되었다고 하는데, 위의 작품은 최근의 작품 '사랑' 2인 것 같아요. 우표에 사용된(제가 가장 사랑하는 원색들만 예쁘게 모인) 원조 '사랑' 작품 원본은 결국 못 찾았네요. 하지만 어떤 사랑이던 작품 ‘사랑’에도 작게 보이는 우표 ‘사랑’에도 빨간 하트 백개를 발사해 줍니다.


기법은 우드 위에 라커라니...

우드에 라커라면 종이보다 훨씬 매끈하고 반질거릴 텐데 작품을 직관해 보고 싶어 집니다.


Thành Chương (타잉 츠엉)의 작품은
Hanoi Art House (https://www.hanoiarthouse.co.uk/)에서 만나보실 수 있어요.
하노이 아트 하우스는 현대 베트남 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미술관으로 영국에 베이스를 두고 있습니다. 이 갤러리는 베트남을 넘어 더 많은 청중에게 베트남 예술을 선보이고 싶어 영국에 갤러리를 열게 되었다고 합니다. 독창성으로 영감을 주는 베트남 작가와 영국의 유명 예술가와 신흥 예술가 그룹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갤러리입니다. 웹 사이트를 통해서 많은 작품 구경해 보세요.



이 화가는 베트남의 옻칠기법(라커, Lacquer)과  

금속으로 된 물체를 장식하는 고대의 기법인 칠보(七寶)의 대가예요. 

이 두 기법을 주 매체로 사용하여 베트남 미술의 전통적 성격에 현대적이고 독창적인 해석을 더했습니다. 


그의 연구와 개발을 통해 베트남 라커 기법이 한 차원 높은 예술 형태로 끌어올려졌으며, 이는 그를 다른 베트남 라커 화가들과 구별 짓는 비결이 되게 되었다고 해요.

1화에서 소개해 드린 '실크 회화 기법'과 이 '라커 회화 기법'이 베트남의 주를 이루는 독특한 화법인데, 정말 이 기법의 작품들은 사진이 아닌 직관을 해야만 그 참 맛을 누릴 수 있답니다. 비록 타잉 츠엉의 작품은 아직 직관을 못했지만 베트남 국립 미술 박물관에 가면 이 기법의 회화들을 원 없이 둘러볼 수 있어요.



두 번째 보여드리는 작품은 작가의 자화상입니다.

선의 배치와 색의 운용에 독창성이 돋보이죠?

색종이를 붙이고 이은 듯한 색감 처리와 스티치가 언뜻 보면 콜라주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이 작품 역시 우드 위에 라커 기법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Self portrait lacquer and gold leaf on wood


이 예술가는 세상을 보는 매우 개인적이고 독특한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유니크하면서도 유연한 미적 감각이 돋보입니다.


그런데 자화상이라니

위의 그림을 한참 바라보다 이 자화상의 주인공이 과연 누굴까 너무 궁금해지니 검색해 봅니다.

오호, 진짜 닮았는걸요? ㅎㅎ



  기자이자 번역가인 아름다운 아내 Hương(흐엉)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을 보고 다시 그림을 보니 작가의 자화상 작품에 고개가 끄덕끄덕 해집니다.

사실적 데생 자화상도 아닌 이 추상적인 자화상이 작가 실물과 싱크로율이 더 높을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건 저만 그런가요?


Self portrait lacquer and gold leaf on wood


붓을 든 오른손을 요리 돌렸다 죠리 돌렸다

귀엽네요. 보라색 빠진 무지개 색을 썼어요. 동심의 빨주노초파남 ㅎㅎ

한쪽 귀는 선으로만 처리하고 그 밑 어깨 위에 작가의 서명을 살짝 올려놓은 센스마저 정말 맘에 드네요.

자글자글 주름살과 밑으로 축 처진 눈과 입매는 사진 속 실제 모습보다 각도를 좀 더 밑으로 잡아당긴 것 같아요. 작품 창작에 대한 작가의 고뇌를 더 담아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는 자화상뿐 아니라 베트남의 농촌 생활, 가족, 사랑 등을 주제로 하여 베트남의 전통적인 주제를 현대적인 시각으로 표현합니다. 국제적인 관객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는 다른 작품들도 구경해 볼게요.


Hapiness, lacquer and gold leaf on wood


그의 '행복' 그림은 화려한 색감 선택부터 심플한 표현 방식이 아주 모던해 보입니다. 하지만 찬찬히 감상해 보면 주제부터 색상과 선의 사용, 관습화되고 장식적인 형태에 이르기까지 깊은 민속적 감성을 담고 있는 것이 보여요. 그런 감성을 극대화하도록 쓰인 매체의 하나가 바로 '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베트남 현대 민속 예술이라 불려집니다.


Moonlight Night II, Lacquer on wood27 3/5 × 35 2/5 in | 70 × 90 cm


'달빛 비추이는 밤' 작품에서는 점 선 면의 미학이 도드라져 보입니다.

칸딘스키의 철학을 너무나 사랑하는 저는 이 작품을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됩니다. 아... 맘에 드네요.

타잉 츠엉은 예술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어요. 그의 예술적 실천은 프랑스 화풍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특한 국가 정체성을 가진 베트남의 현대 미술을 발전시키려는 새로운 움직임으로 이끌어졌죠. 그래서 그는 베트남 문화와 예술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 준 화가라고 칭송받는답니다.



Raising Buffalo, Lacquer on wood23 3/5 × 31 1/2 in | 60 × 80 cm


'소 기르기' 

이 작품의 주제로도 '소'가 계속 사용되고 있네요.

소의 코가 사람의 코로 표현된 지점에서 베트남인과 소가 긴밀하게 밀착된 관계를 이야기해주는 듯합니다.


소는 단순한 가축을 넘어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며, 다양한 상징과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힘세고 끈기 있는 동물인 소는 베트남에서도 전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농경 사회인 베트남에서 소는 풍요와 번영의 상징이며 노동과 인내의 상징이고, 가족의 생계를 지탱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족의 일원임으로 스페셜한 돌봄과 대우를 받습니다. 소는 다양한 축제, 민속놀이, 전설 등에도 등장합니다. 이러한 문화적 맥락에서 소는 행운, 건강, 장수를 상징하는 문화적 상징이기도 하죠. 또한 베트남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12 지신 중 하나로 소가 포함되어 신년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소의 해는 성실, 인내, 노력의 해로 여겨지며,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이러한 특성을 가질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그의 작품에 소가 자주 등장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그는 베트남의 전통적인 농경 사회와 그 속에서의 인간과 자연의 조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Thành Chương(타잉 츠엉)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베트남의 전통적인 가치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베트남 문화에서 부, 풍요, 노동, 인내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소'의 상징성은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일치합니다. 그의 작품 속 소는 베트남 사람들의 삶과 정신, 그리고 자연과의 깊은 연결을 상징하는 모티브로 사용되지요. 이를 통해 관람객에게 더 깊은 의미와 감동을 전달하고자 하는 그의 진한 의도가 느껴집니다.




소...

여기서 잠시...

소에 대한 집착이 상당히 강했던,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한국의 대가 한 명이 생각나지요?

그 이름 바로 '이중섭'

반 고흐가 선을 짧게 짧게 끊어주어 강렬 함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던 것에 반해,

이중섭 작가는 선을 길고 힘 있게 그어줌으로써 '선'의 특성을 살리는 것으로 유명한 화가입니다.

선으로 운동감을 표현하는 대가이죠.

붉은 바탕의 배경은 마치 투우사를 생각나게도 하는 역동성이 가득합니다.


소 그림으로 빼놓으면 무척 아쉬울 또 한 명의 대가

'마르크 샤갈'도 생각이 나네요.

같은 흰 소라고 해도 이중섭의 흰 소는 훨씬 더 현실적인 의미로 사용된데 반해 샤갈의 흰 암소는 사물의 근원을 나타 내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중섭은 소를 통해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자 했으며, 좀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을 그리고자 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지요. 이에 반해 샤갈의 흰 소는 추억이 아련히 깃든 동화 속 동물 같은 그림체의 '소와 나'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베트남, 한국, 프랑스 화가들이 소를 바라보는 관점과

서로 완전히 다른 표현력이 정말 흥미롭지 않나요?




영국행 비행기 티켓을 사지 않는 이상 타잉 츠엉의 작품을 직접 볼 수는 없고

하지만, 하노이 올드 쿼터에서 타잉 츠엉의 작품을 라커웨어(Lacquer ware)로도 만나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나마 서운함이 조금 풀리죠.

이렇게 장식품으로 만들어 내니 그의 소는 상당히 세련된 데코레이션이 되었네요.

저도 두 마리만 입양하러 얼른 호안끼엠으로 나가 봐야겠어요.


베트남 전통모자 논라(Nón Lá)를 미니 사이즈로 제작해 소에게 매치해 둔 아이디어가 너무 귀엽습니다.



이 장식품을 판매하는 곳은 4대째 가업을 이어 가문의 역사와 정통성을 자랑하는

'Tanmy Design' (탄미 디자인)이라는 곳이에요.

베트남 전쟁 때 손수건에 수를 놓는 자수 가게부터 시작해 지금은 하노이의 전통적이고 예술적인 아이템들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죠. 세계 정상들이 하노이를 방문할 때면 퍼스트레이디들이 한 번씩 꼭 들러가는 곳이랍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연인과 남편 아들 딸들에게 쥐어 주던 수 놓인 손수건에서 시작된 이 자수 가게의 이야기를 예전에 글로 쓴 적이 있어요.

함께 읽어 보시면 좋으실 것 같아 링크 공유해 드릴게요.


https://brunch.co.kr/@nanechn/40

이 글에서는 베트남 여성 박물관 구경도 하시고 탄미 디자인 스토리도 읽어 보실 수 있답니다.

클릭해 보세요!



이전 02화 ’ 세계 커피 박물관‘에 같이 가보실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