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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틸다 하나씨 May 23. 2024

목각 조형이 품어 낸 온기

대담하고 부드러운 온도

[Kim đồng, a juvenile heroic martyr]1976, wood, 121*32.5*33cm


조각 칼날 사이 공간을
꽉 물었다
 튕겨 내뱉는 나무칩은
허공으로 비상합니다.

이내 바닥으로 착지하는 소리가
 작업실 적막을 깨뜨리고

 땀방울 맺힌 숨소리만
공기 중에 떠다닙니다.




기다랗고 투박한 통나무에서

어찌 이리 부드러운 조각품이 튀어나왔을까요?

마치 마술처럼요.


목각 예술가의 영감이 깃들면,

고도의 섬세함은

대범한 부드러움을 불러와

나무속에 온기를 심어 넣어 주기에

그렇겠지요.


이 목각 조형물을 360도 빙 둘러 천천히 걸어봅니다.

바라보기만 하는데

따듯합니다...

체온이 느껴집니다...


2001년 베트남 미술부문 국가상을 수상한 첫 번째 소수민족 조각가

Hứa Tử Hoài (후어 뚜 호아이)의

'Kim đồng, a juvenile heroic martyr'

(낌동, 소년 영웅 순교자) 목각 조형물입니다.


현대적인 숨결과 깊은 인도주의 정신을 물씬 풍기는 수많은 작품을 남긴 조각가인데 그는 많은 동료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었던 예술가라고 합니다. 따듯한 품성이 그의 손 끝에 담겨 조각되었나 봅니다.


이상하게도, 돌과 나무는

영겁의 세월이 흐르고

그 뿌리가 뽑혔다 해도

여전히, 온기를 품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을 처음 마주했던 순간

저는 분명 천 년 전 백제의 석공이었을지 모른다는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혀 그 두근대는 심장을 어찌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노이 국립 미술 박물관에서 만난

이 목각 조형이

또…

저를 그렇게 만듭니다…


이렇듯 가끔, 어떤 조형물 앞에 서면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물처럼 저를 휘감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떨림'과 '경이'의 감정에 가까운 듯합니다.


'낌동' 조각상안에 켜켜이 스민 따스함으로부터

두근대는 '침묵'을 선물 받은

귀한 날로 여겨지네요.





[Song Sli, Singing Sli] 1983, 63*27.5*24cm


Hứa Tử Hoài (후어 뚜 호아이) 작가의

또 다른 작품 'Song Sli (노래하는 슬리)'입니다.

'Singing Sli'라고도 'Chantant Sli'라고도 표기된 걸 보면 평화의 구호를 외치는 노래를 하는가 봅니다.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한 두 친구

혹은 형제일까요. 얼굴이 참 많이 닮았어요.

정스러운 두 소년 모두

얼굴이 동글동글

주름진 옷깃의 곡선도 동글동글

통통한 발등까지 동글동글합니다.

그 부드러운 곡선을 타고 날아든 청아한 화음이 제 귓가에 일렁입니다.


예쁘고 순수한 ‘평화’의 노랫말이 들려오는 듯하네요.


문화적 정체성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목각 예술이

그 고유한 정체성을 표현해 주는 순간입니다.

베트남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반영하고 보존하는 이 작은 조형물 하나하나가

너무나 위대해 보이는 이유이겠지요.







[đi học chứ bác hồ] wood, 1973, 90*23*23cm


Tạ Quang Bạo(타 꽝 바오)의 작품

'đi học chứ bác hồ' (호 아저씨에게 배우러 가는 길)입니다.


마치 오줌싸개가 둘러 쓰고 소금을 얻으러 가야 했던 한국의 '키'와 엇비슷하게 생긴 모자를 쓰고 있어요. 소수 부족의 스커트로 스타일도 갖춘 소녀의 조각상입니다.


한 손에는 책을 다른 한 손에는 어린 동생을 둘러 안고 공부하러 가는 누나처럼 보이는 씩씩한 모습이 눈길을 끌어당깁니다.

어린 소녀일진대 그 눈매와 입매에는 책임감이 가득한 장녀처럼 든든해 보이는군요. 아직 뭘 모를 듯한 어린 동생도 누나 따라 학당에 배우러 가는 길이 뿌듯한 듯 조그만 얼굴이 아주 자신감 넘쳐 보입니다.






[cuộn chỉ]1973, wood, 85*27.5*31.5cm


Lê Công Thành(레 꽁 타잉)의 작품

'cuộn chỉ'(타래, winding the thread)입니다.

 

여고생 시절의 어느 점심시간,

운동장 벤치에 앉아 블라우스 만들기 수업시간에 미처 다 못 끝낸 바느질을 하고 있었어요.

짝사랑하던 수학 선생님이 제 앞을 지나가시며 "오늘은 블라우스 만들었니? 예쁘게 잘 만들었네~" 하시는 거예요.

호드득 놀라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고도 그 선생님이 말 한마디 걸어 주신 게 마냥 좋아서는

얼굴이 홍시만큼 빨개졌었던 추억 한 장면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그렇게 순수했던 소녀가 여기에도 앉아 있거든요.

무르팍에 사뿐히 올려진 동그란 실타래가 추억을 감아 돌려줍니다.


실타래를 돌리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에 홍시처럼 예쁜 오렌지색 명주실을 걸어 주고 싶군요.

살포시 감고 있는 눈가를 따라 번지는 그녀의 미소가 재미나 보이기도 하고 수줍어도 보여서

저도 덩달아 그 옛날 앳된 소녀의 미소를 따라지어 봅니다.


그렇게 우리 잠시,

눈 감고 서로의 눈을 마주쳐 봅니다.





[nữ công nhân],1965-1966, wood, 34.5*22*20cm


마지막 작품은 Nguyễn Khắc Nghi(응우옌 칵 응히) 작가의

'nữ công nhân'(여성 노동자, worker woman)입니다.


두건을 둘러 쓴 여성 노동자의 야무진 눈 코 입.

왠지 먼지도 함께 둘러쓰고 있는 듯한 느낌에 조용히 손수건을 내밀어주고 싶어 집니다.


베트남 여성은 어디서나 강인해 보입니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

그녀도 실크 스카프를 두른 가녀린 여자로

바라봐 주기를 원할지도 모르죠.

괜스레 안쓰러운 마음에

조각상 밑 ‘여성 노동자’라고 타이틀이 적힌 은색 캡션 위를 포스트잇으로 살짝 가려두고는

토다닥 도망쳐 나왔습니다.


레포 작가의 그녀인 듯 ‘스카프를 두른 가녀린 여인’이라고 제목을 바꿔서 붙여둘걸... 에잇!

근처에서 작품을 지키고 계신 분 눈치를 보다가 급히 도망쳐 나오고선 후회 중인,

센스 부족 소심이랍니다.






오랜 시간 변형이 없도록 내구성이 좋은 나무를 고르고 골라 조각했을 텐데 조각품들마다

군데군데 갈라지고 금이 간 흔적이 보입니다.

조각가의 마음도 갈라질 것 같아요.

습한 동남아의 특성상 온전한 보존이 매우 어렵겠지요. 목각 조형물의 경우에는 흰개미의 습격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 그건 정말 상상하고 싶지 않네요.

섬세한 돌봄 가운데 이 훌륭한 예술품들이 잘 보존되어 백 년 후의 사람들도 그 이후의 사람들도

제가 느끼는 같은 온도의 따듯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린 다섯 작품은 모두 하노이 베트남 국립 미술 박물관에 소장 중인 목각 조형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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