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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틸다 하나씨 Jun 27. 2024

호 아저씨

호랑이도 고개를 떨굴걸요

베트남의 동맥에 흐르고 있는 "호 아저씨"


이쯤 왔으면 이 분을 빼놓고는 동력을 더 낼 수 없을 것 같네요.

마치 김일성 주석의 액자처럼 집집마다 학교마다 모든 공공 기관 어디든 걸려 있는 이 분의 초상화를 보며

공산주의 사회의 의무이겠거니 했었습니다.

하지만 오래 살수록 더욱 알게 되는 것은 그것이 강요와 의무의 개제만이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분이 얼마만큼 대단하게 베트남인의 정신에 깃들어 있느냐를 알아갑니다.

베트남 민족문화 예술의 영역뿐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생활 습관과 국민 도덕 정신의 근간에까지 그의 정신과 가치, 고결한 신념은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런 지도자를 보유한 이 국가는 축복의 국가라는 생각이 들어 부러워지기까지 합니다.


"호아저씨"(Bác Hồ, 박 호)라는 표현은 베트남의 국부이자 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한 혁명가

 호찌민 주석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그의 본명은 Nguyễn Sinh Cung(응우옌 신 꿍)이며, 중국어 독음 이름 '후즈밍'(胡志明)을 비롯하여 생전에 가명과 필명이 모두 약 160여 개 이상 되었다니 예사롭지 않은 세계를 살 던 분임이 분명합니다.

후에 불리어지는 Hồ Chí Minh(호찌민)이라는 이름은 '광명을 가져다주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의 여러 방언을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태국어,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에도 능했던 탁월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호찌민 주석의 생애와 업적은 독립 · 자유 · 평화 · 민주 · 사회적 진보를 위한 투쟁 그 자체였습니다. 현재까지도 정부에서는 ‘호찌민 도덕 사상과 생활 모범 학습 운동 추진’에 대한 5호 지시를 전 국민에게 내리며, 그 시행한 성과를 되돌아보기 위해서 베트남 공산당은 전국대회를 열기도 하고 55년간 매년 그를 기리는 축제와 행사를 주최하고 있습니다.


참 대단한 영웅과 그 영웅의 나라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베트남의 ‘국부(國父)’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길래...

그의 수많은 업적이 있지만 간략하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1945년 9월 2일, 그는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는 프랑스 식민 통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었습니다. 1941년에 베트남 독립 동맹회(Viet Minh)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이끌며 프랑스의 점령에 저항하는 활동을 주도했었지요.


잠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드리자면,

1919년부터 1920년까지 파리에 정착하며 본격적인 베트남 독립운동을 시작했던 호찌민을 밀착 감시하던 프랑스 정보경찰 장(Jean)이라는 인물이 작성했던 정부 문서가 2018년에 발견되었습니다.

호찌민이 당시 ‘애국(愛國)’이라는 뜻을 가진 ‘응웬아이꾸옥’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이라는 공통 연대를 가지고 함께 교감을 나눈 사실이 기록된 문서였지요.


프랑스 정보경찰 장(Jean)이 작성한 정부 문서 ⓒ 베한타임즈


문서에는 "응웬아이꾸옥(호찌민 주석)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서기장 황기환을 비롯하여 김규식, 조소앙, 윤해등과 친밀하게 지냈으며 특히 영어가 능통한 황기환 서기장과는 많은 대화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심지어 호찌민 주석은 자신을 감시하는 프랑스 경찰 '장'을 황기환에게 소개해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임시정부 요원들은 호찌민이 통신국을 자유롭게 쓰게 했고, 그의 저작물과 홍보물이 중국과 파리에 유포되도록, 김규식이 도왔으며 서로 집을 방문할 정도로 친밀했다는 정황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이 있었다니 너무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이러해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던 한국군에 대한 미움이 크다해도 호찌민을 도왔던 한국이였기에 무조건 한국을 미워하지만은 않았던 이유였을까 싶기도 했고요. 한국과 연관된 이야기에 흥분이 돼서 이러다가는 몇 페이지를 더 만들 것만 같으니 여기서 자중하겠습니다. ㅎㅎ 그다음 이야기로 이어갈게요.

 

1946-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동안 베트남 독립 동맹회는 프랑스를 상대로 싸워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제네바 협정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그리고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분단되게 되지요.


1954년부터 1969년까지 북베트남의 주석으로 재임했던 호찌민은 경제 개혁, 교육 발전, 농지 개혁 등을 추진하여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미국에선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불림) 동안 북베트남을 지도하며 남베트남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베트남 통일을 위해 싸웁니다. 그의 지도력 아래 북베트남은 강력한 군사 전략을 통해 남베트남의 미국 지원군과 맞서게 됩니다.


호찌민은 1969년 전쟁 중 사망했지만, 그의 비전과 정책은 계속 이어지고

마침내, 1975년 남베트남이 함락되고 베트남은 통일되게 됩니다.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그였기에, 종전 후 당시 베트남 공화국의 수도였던 사이공은 그의 이름을 딴 '호찌민 시'로 개명되었고 그의 사상과 지도력은 현재까지도 많은 베트남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인정과 존경을 넘어
영웅이 되었습니다.



1890년 베트남 북부에서 출생한 호찌민의 생일 5월 19일은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매년 5월 19일이면 모든 집은 국기를 게양하고 하노이의 모든 거리에는 그를 추모하는 빨간 깃발이 설치됩니다. 그는 시신을 화장하고 소박한 장례를 치를 것을 유언으로 남겼지만 베트남인은 존경하는 국민 영웅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1969년 9월 2일 호찌민 주석이 서거한 후, 레닌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유명한 소련 과학자 팀과 베트남 전담 의료팀이 협력하여 호찌민 시신을 방부 처리하고 하노이 호찌민 묘소 내 유리 관 안에 안치했습니다. 현재까지 이곳에는 매년 수천 명의 여행객이 방문하고 있으며 베트남 국민들도 때마다 참배하고 있습니다.


호찌민 주석의 묘 ⓒ vinpearl / 회색 화강암으로 덮인 호찌민 주석의 묘는 매우 견고하게 설계되어 홍수, 폭격, 7급 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 하노이시의 대표적 건축물입니다


"Không có gì quý hơn độc lập, tự do"
독립과 자유보다 귀한 것은 없다
"Cùng ở, cùng ăn, cùng làm"
함께 산다, 함께 먹는다, 함께 일한다


단순하지만 이보다 명쾌할 수 없고

국민과 한 몸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강하게 증명할 수 없는

그의 말은 베트남인들의 마음속에 존경과 친밀함으로 각인되어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 그와 관련된 예술 작품들을 보여드릴게요.


[Đi học chữ Bác Hồ] 호 아저씨께 배우러 가는 길, 2000, lacquer

Đoàn Văn Nguyên 도안 번 응우옌의

[Đi học chữ Bác Hồ], 호 아저씨께 배우러 가는 길


베트남 전통 의상을 입은 떠이 응우옌 지방의 네 명의 여자들. 한 명은 아기를 둘러업고 한 명은 가방 대신 바구니를 둘러메고 학교에 갑니다. 모두들 똑같이 빨간 스카프를 두르고 가는데 호아저씨 학당의 교복일까요? 현대의 베트남 공립학교 초등학생들의 교복에도 빨간 스카프가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도 그 스카프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들이 두른 스카프는 왠지 소박한 빨강빛으로 따듯이 감싸주고 있는 듯 느껴지는데

과연 그 빨강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요?

베트남 국기도 빨간색, 공부하러 가는 학생들의 스카프도 빨간색인데,

빨간색은 베트남 독립을 위해 흘린 베트남 국민의 피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모두들 빨간 스카프를 두르고서

깊은 존경심을 담아

호 아저씨에게 인생의 근간을 배우러 갑니다.  


한국의 자개 공예가 반짝이는 조개껍질을 덧입고 성숙해 왔다면 베트남의 옻칠 예술은 하얀 달걀 껍데기와 함께 자라났습니다. 달걀 껍데기로 의상의 기하학적 무늬를 넣고 반짝이는 금색 바탕에 가공되지 않은 옻칠로 작품을 창작하였죠. 그림이 담은 의미뿐 아니라 표현의 디테일도 함께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빨간 머플러를 두르고 등교하는 베트남의 공립학교 학생들 ⓒ vinahanin

현재도 공립학교 학생들은 이렇게 호아저씨가 메고 있었던 빨간 스카프를 두르고 등교합니다.

여학생들의 해맑은 웃음이 참 보기 좋네요.

아래의 사진처럼 호찌민 주석이 학생에게 이 빨간 스카프를 메어 주고 있는 장면의 사진이 모든 학교에 걸려 있답니다.

학교 정면에는 항상 호찌민 주석의 사진 또는 초상화가 걸려있습니다


호찌민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Yêu Tổ quốc, yêu đồng bào

Học tập tốt, lao động tốt

Đoàn kết tốt, kỷ luật tốt

Giữ gìn vệ sinh

Thật thà dũng cảm”


"조국을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자

학습을 잘하고, 노동을 잘하자

단결을 잘하고, 규율을 잘 지키자

위생을 잘 지키자

정직하고 용감하자"


그리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가르쳐 주었죠.

베트남의 독립을 향한 열망과 투쟁의 역사,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희생과 노력.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

호찌민의 가르침을 통해 베트남은 성장하고 발전합니다.


항상 어린이들 곁에 있었던 호찌민 주석 ⓒ hoankiem.edu.vn

아이들을 사랑하고 가장 귀하게 여긴 호찌민

그의 정신을 따라 사는 베트남인은 아이들을 무척 사랑할 뿐 아니라 대단한 교육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철학과 지도력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삶과 투쟁을 통해 호찌민의 사상과 가르침을 체득해 나갑니다


그것뿐인가요.

무엇보다 그의 소박함과 검소함은 국민들이 그를 따르게 하는 주요 원천입니다.

호찌민은 나라의 주석이 되어서도 간소한 옷을 입고 소박한 생활을 유지하며 친밀한 마음으로 민중을 배려하는 지극히 평범하며 친절한 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국민이 마음으로 우러러보는 민중의 지도자가 된 것이죠.


저희 옆집에도 대단한 분이 살고 계십니다. 한국으로 치면 현대건설 격인 베트남의 가장 큰 건설회사 전 회장님이라는 이력 외에도 여러 대단한 이력으로 현재까지 제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분이시죠. 명절 때면 대단한 외제 차들이(베트남 거리에는 아우디, 벤츠등 외제차들이 참 많은데 그 녀석들조차 감히 명함 내밀지 못할 베트남에 한 대 있을까 싶은 리미티드 차들을 구경합니다) 트렁크 한가득 선물을 싣고 와 줄을 서 있습니다. 하노이에서 금괴와 현금 보유액이 손가락안에 꼽히는 집이라고 무성한 소문이 자자한데 단 한 번도 옆집 3층의 창문이 열린 적이 없어 우리는 3층에 거대한 금고가 있을 거라 추측하며 항상 썬글라스를 끼고(?) 지켜보고 있답니다. 가끔 옆집에 놀러 가도 1층과 커다란 제단이 있는 지하밖에 보질 못했으니, 우리 집 3층 창문에서 불과 3미터 사이로 바라보이는 굳게 닫힌 창문은 너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죠. 창문이 열린다고 콩고물이 떨어질 것도 아니지만 블랙 쫄쫄이 입고 미션 임파서블 한 번 찍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3층이라죠.ㅎㅎ 그런데 그분은 매일 같이 허름한 반바지 티셔츠 차림에 쪼리를 끌고서 베트남에서 개발한 빈패스트의 소형차(우리나라 모닝과 비슷)를 주로 몰고 다니십니다. 그런 털털한 모습으로 시골에서 따온 과일을 척척 안겨주고 가시고는 한답니다. 주차장에서 주로 잠을 자는 최고급 렉서스는 주로 약속이 있는 날에만 타고 나가시는 듯 보입니다. 대단한 부자이고 권력가이면서 검소함을 챙기는 미덕을 이 분뿐 아니라 수많은 부유층의 베트남인들에게서 심심찮게 보게 됩니다. 부유함 속에서 검소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그들의 모습이 참 인상적인데 이것이 다 호아저씨께 교육을 받은 덕택이겠지요.




지난번 목각 조형 편에서 소개해 드렸던

동생을 들춰안고 호 아저씨께 배우러 가는 누나의 목각 조각상을 기억나시나요?

여기에는 그 동생보다는 조금 커 보이는 유치원생 정도의 귀여운 아이들이 엉덩이를 치켜들고서 책상에

달라붙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Nguyễn Sỹ Tốt 응우옌 시 똣의

[Em nào cũng đươc đi học], 모든 어린이는 배울 수 있습니다

그의 그림은 소박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네요. 정감 있는 시골 학당의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 위에 평온의 진동을 일으킵니다.


그림 위에 작가가 연필로 써 놓은 듯한 글씨

“Nhớ Ơn Bác Hồ” 호 아저씨(호 삼촌)를 기억하라

라는 문구가 제 마음에 연필 소리를 내며 다시 쓰이는 듯합니다.


베트남에서는 “Nhớ Ơn Bác Hồ” 호 삼촌을 기억하자라는 동요도 있답니다.

진심이 담긴 동요가 베트남 전역에 울려 퍼지고 있지요.


Ai yêu nhi đồng bằng Bác Hồ Chí Minh

Ai yêu Bác Hồ Chí Minh bằng chúng em nhi đồng

A có Bác Hồ đời em được ấm no

Chúng em múa ca càng nhớ công ơn Bác Hồ

Hứa với Bác Hồ rằng cháu sẽ chăm ngoan

Cháu xin kính dâng ngàn đoá hoa lên Bác Hồ

Ai yêu nhi đồng bằng Bác Hồ Chí Minh

Ai yêu Bác Hồ Chí Minh bằng chúng em nhi đồng

A có Bác Hồ đời em được ấm no

Chúng em múa ca càng nhớ công ơn Bác Hồ

Hứa với Bác Hồ rằng cháu sẽ chăm ngoan

Cháu xin kính dâng ngàn đoá hoa lên Bác Hồ


호 삼촌만큼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

우리 아이들보다 호 삼촌을 더 사랑하는 사람

호삼촌과 함께라면 내 삶은 풍요로워져요.

춤추고 노래할 때 호삼촌의 고마움은 더욱 기억에 남아요

호 삼촌에게 잘 지낼 거라고 약속해 주세요

나는 호 삼촌에게 수천 송이의 꽃을 정중하게 바칠게요

노래하고 춤추면 호삼촌의 고마움은 더욱 생각나네요

(반복)



옛부터 지금까지

베트남의 학생들은 모두 열심을 다하여  

"호 아저씨"(호 삼촌)께 배우러 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조소 언어로 그를 기리고 있는

느낌이 사뭇 다른 두 개의 호찌민 주석 흉상을 보여 드릴게요.


Trần Văn Lâm(찬 번 람) 작가의

[Chân dung Bác Hố] 호아저씨의 흉상


하노이 국립 미술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호찌민 주석의 흉상입니다.

브론즈의 빛을 담아 작은 체구가 참 단단하게도 빛나고 있습니다.

더도 덜도 표현할 필요가 없는

그저 호찌민 주석 그 자체이지요.



(저 뒤로 '노래라는 슬리'가 보여 반가운 분도 있으시죠? ^^)



Nguyễn Thị Kim (응우옌 티 낌)의

[호찌민 주석의 흉상], 1946년 순수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하고

국보가 된 예술품입니다.


위의 흉상이 정자세로 각 잡은 호찌민 주석의 초상화 같았다면

아래의 흉상은 고뇌하는 호찌민, 마치 '생각하는 로뎅'이 떠오르기도 하는 작품입니다.

응우옌 티 낌 작가는 호찌민 주석이 강렬한 집중력으로 독서하는 자세를 본떠 만들었다고 합니다.

약간 기울인 머리, 생각에 잠긴 표정, 긴 수염과 주름진 넓은 이마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국립역사박물관 (구 베트남혁명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Hồ Chủ Tịch  Bắc BộPhủ] 1946, 목판화
그의 사진을 목판화로 만들었습니다. 흑백 사진과 세피아 톤 목판화 중 어떤 느낌이 더 좋으신가요


Tô Ngọc Vân (또 응옥 번) 작가의

[Hồ Chủ Tịch  Bắc BộPhủ], 호찌민이 박보에서 일하시다


지난번 소개해 드린 국보 회화 중 노란 아오자이와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두 소녀와 남동생의 그림을 기억하시죠?

그 평온한 세 남매의 그림을 그렸던 국민 작가' 또 응옥 번'의 작품입니다. 그는 1954년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그림을 그리다 사망한 위대한 예술가로 그의 재능과 공로 그리고 젊은 베트남 미술가들에 대한 공헌으로 1996년 호찌민 문학 예술상을 수상합니다.


혁명 전 후로 그의 화풍이 많이 달라졌다는 설명을 드린 적이 있는데 정말 그렇게 느껴지시죠? 그의 목판화 [호찌민이 박보에서 일하시다] 혁명정권하에서 완성한 첫 번째 작품이자 호찌민 주석을 주제로 한 최초의 대표작입니다. 나무 판화 기법으로 작품을 창작했는데 조각의 필법이 매우 거칠고도 명확하게 다가옵니다. 평온함 그 자체였던 회화 작품과는 선명히 다른 특징을 보여줍니다.


거칠고 강렬한 그의 조각 패임에 대비되며 수수한 주석의 사진 이미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요. 호찌민 주석을 향한 믿음과 사랑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일하고 있는 모습, 만년필, 잉크병 재떨이, 공문이 올려진 나무 테이블이 섬세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주석의 이마는 높고 넓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마른 얼굴 위로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위엄 있고 고상하며 다소 고독한 모습인 것 같지만 동시에 매우 단순하고 친밀하게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주석의 정신을 담아내었습니다.






Lê Văn Nghĩa (레 번 응히아)의

[Chân dung Bác Hồ được khắc họa bằng lá sen] 호찌민 주석 연잎 초상화


연못에서 주어 온 연꽃잎을 6개월간 말려 재료로 사용한 '연잎 초상화'라니 정말 독특하죠?

베트남의 전통문화와 자연을 결합하여 현대적인 예술 작품으로 재해석한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잘 바스러져서 표현이 꽤나 어려울 테고 곰팡이 습격도 만만치 않을 듯한데 자연의 소재인 연잎의 질감을 살리면서도, 각가 다른 명도의 색감까지 살려내고 있습니다.

연잎, 연맥, 부스러기 심지어 먼지까지 결합하여

이렇게나 자연스럽고 세밀한 디테일을 구현하여 인물의 특징을 표현하다니요...

작품을 만드는 중에는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잊어버린다는 이 작가를 보면 진정 예술가는 예술가구나라는 찬사를 보내게 됩니다.




마른 연잎의 질감이 오묘하면서도 사실적으로 주름을 묘사해 내고 있어요.

자연의 소재가 표현하는 것이라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일 테지요.

나이 듦의 표현이 자연 속에 담기어 너무나 리얼하고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그 주름 안에 그어진 카리스마까지... 그저 멋집니다.



연맥을 잘 살린 디테일 또한 아주 인상적입니다.

연맥은 배경도 되고 수염도 되고 머리칼도 되는군요.

부스러기는 꽃이 되었고요.


연잎 초상화 ⓒ https://baodantoc.vn/


먼지까지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그의 발상

정말 놀랍습니다.






고등학생이 그린 호찌민 주석의 초상화 ⓒ vietgiaitri

Nguyễn Văn Cường (응우옌 반 끄엉)

[Vẽ chân dung Bác Hồ bằng chữ] 고등학교 10학년 생의 작품

타이포그래피로 호찌민 주석을 표현하다


Việt Nam이란 단어를 무한 반복하여 타이포그래피 아트를 만들어 냈습니다.

글자의 크기 굵기, 응축, 형태의 복합적인 사용으로 완성된 이 초상화는

다다_다다이즘의 경향을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 학생의 아이디어와 표현력 그리고 그 정성에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베트남은 어린 학생부터 나이 든 노인까지 각양각색의 소재로 호아저씨(호 삼촌)를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오늘 보여 드린 작품 외에도 다양한 기법으로 창작된 호아저씨의 초상화들이며 티셔츠, 그 외의 다른 아이템들이 차고 넘칩니다.

그만큼 베트남인의 마음속에 호아저씨가 살아 움직이고 여전히 차고 넘쳐흐른다는 반증이겠지요.


호아저씨는 베트남의 슈퍼 히어로,

어벤져스인가 봅니다.

그저 엄지를 치켜세우고

대단하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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