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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틸다 하나씨 Aug 29. 2024

스티치 & 모티프

자수와 깊어진 사랑

대학교 2학년 시절 학과 교수님으로부터 인생 최초의 원서 초안 번역알바를 얻게 되었는데, 그 책은 ‘The world of embroidery’(자수의 세계)였습니다. 자수라고는 십자수 곰돌이를 만들어 본 게 전부였던 스무 살에겐 너무나 새롭고 커다란 세계였죠. 그것은 영어를 번역하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일이었습니다. ‘뭘 믿고 내게 이걸?’ 수백 번은 외쳤더랬지만 진땀을 뻘뻘 흘린 대가로 적지 않았던 봉투 속 금액을 확인하고는 깡총깡총 뛰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보수를 받아 든 그때는 근자감에 뿌듯했었건만 시간이 지날수록 몰려오는 부끄러움과 아쉬움이란… 글을 번역했을 뿐 자수를 알고 전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지금 다시 하면 훨씬 잘 해낼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아직도 떠나질 않고 있어요. 항상 어제는 어찌할 수 없는 아쉬움 속에 머무나 봅니다.


그렇게 갑자기? 억지로? 생뚱맞게 만났던 자수

베트남 살이를 시작하며 더욱 사랑이 깊어집니다.


이 나라의 수공예품 '토껌'(thổ cẩm) 중에서

자수 공예도 수공예 기술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자수는 직물에 밑그림을 그리고 다른 직물을 덧대서 수틀에 매고 밑그림 위에 수를 놓습니다.

선을 만드는 이음수

면을 채워나가는 평수

꽃 술 등을 표현하는 매듭수

다양한 수의 기법을 활용하여 멋진 작품이 탄생하는 섬유 예술의 영역입니다.


병풍, 장신구, 주머니, 골무 등 생활 소품 및 실내장식품에 실과 바늘이 살려내는 색과 입체감은 한국이나 베트남이나 매 한 가지의 정성과 인내가 담겨 있지요.

자수의 한 땀 한 땀 스티치가

어떤 주제를 담은 모티프와 만날 때

작품은 완성되고 예술과 산업이 융합하여 굉장한 가치가 창출됩니다.


보고 있으면 입을 다물 수 없게 되는 한국의 자수 역사도 삼국시대 이전 심지어 선사시대부터 시작됐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베트남은 17세기 레꽁하잉(Le Cong Hanh)이 중국으로부터 자수 기술을 습득하여 베트남 고유의 자수기법으로 발전시켜 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깊은 역사 속에서 자라난 자수는 그 세월의 깊이만큼 깊은 수를 두는가 봅니다.


한 땀 한 땀 반복되는 자수는 옛 여인들이 마음을 다스리고 안정을 찾는 명상 시간과도 같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그런 마음 다스림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물들에 진심과 감동이 담기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여러 여인이 같은 그림을 수놓았다 해도 모두가 미세하게 다르고 독특한 멋이 깃들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게 수 작업 공예품의 매력이고, 세상 단 하나뿐이라는 그 의미가 높은 가치를 담을 수밖에 없습니다.





Xq Da Lat Art House (달랏 자수 박물관)


요즘 핫한 여행지로 뜨는 달랏 지역에 멋진 곳이 있습니다. 달랏 여행을 하시는 분들이라면 한 번 꼭 들러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50 x 70cm (19.7 x 27.6")

이 작품은 그림일까요?

확대해서 보여드릴게요. 다시 한번 보실래요?


그림인지 사진인지도 헷갈리는 이것은

손으로 한 땀 한 땀 놓은 자수 작품이랍니다.


베트남은 자수의 영역 중에서도 가장 표현력이 어렵다는 초상화에서 탁월함을 발휘합니다.

사진도 아닌 리얼리즘 회화도 아닌 손 자수로 완성된 이 작품의 가격은 한화로 약 천만 원에 책정되어 있습니다. 그럴만하지요? 그 수고와 재능을 생각하면 오히려 너무 적은 금액으로 측정되었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자수의 영역에서 풍경화도 빠질 수 없죠.

이 작품은 일단 사이즈로 압도합니다.

얼만큼의 시간이 담긴 작품인지요. 가늠이 안되네요.

180 x 295 cm (5.91 x 9.68 ft)

곱디고운 정교한 수와 꽃밭의 색감으로 덮여있는 작품입니다.

베트남에 여행 오시는 분들이 그림 구매도 많이 하시는데 요즘 뜨고 있는 관광지인 달랏을 선택하신다면 이곳에서 예기치 않은 지갑이 열릴 수 있으니 정신을 바짝 가다듬거나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따라가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합니다. 몇천만원을 호가하는 고가의 작품들 속 십만원대의 미니 작품들도 훌륭하니 하나쯤 소장해 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되지 않을까요?


95*135cm

Con đường du tử  '방황의 길‘이란

작품의 주제처럼 신비한 숲의

오솔길에서 길을 잃을 것만 같이

빛의 질감이 탁월하게 표현된 작품입니다.

실의 이음으로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니 예술가의 한계는 정녕 없는 걸까요?

밝은 햇살 때문인지 저는 방황보다

저 길 끝을 돌아서면 반가운 얼굴을 만날 것만 같아요.




베트남에 전통 자수 마을도 여러 군데 있는데 그중에서도 동끄우 마을(Đông Cứu)은 부반지오이(Vũ Văn Giỏi) 가족이 왕실 의상을 전문으로 제작해 온 마을입니다. 그는 베트남 자수의 장인 중 첫 번째로 손꼽힙니다. 이 장인 가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동끄우 마을 사람들도 왕실 가족을 대상으로 특별한 의상과 도구 등을 만들기 시작했지요. 왕실 관복은 한 벌을 만드는데 일 년 이상이 걸리는 정교한 작업입니다. 보석과 반짝이는 실을 섞어 넣어 자수를 새기기 때문입니다. 수천 가지에 달하는 세부적인 디자인이 모두 조화를 이룰 때 위대한 문화적 가치가 있는 예술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고 부반지오이는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 왕자가 입을 옷인가 봅니다. 정말 예쁘고 정교해요.




호안끼엠 거리를 여행하다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일반적인 자수 그림들도 보여드릴게요.

하지만 일반적이라 표현하기엔 이조차도 너무나 섬세합니다.




또 다른 자수마을 꿧 동(Quất Động)에서는 자수에 관심 있는 학생들에게 교육을 시키기도 하고 주로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의 직업으로 자수 산업을 활성화시키기도 합니다. 마을별로 각 분야의 예술 산업을 지켜가는 모습이 참 대단합니다.





이런 작품만이겠어요.

무엇보다 베트남의

전통의상 아오자이에 새겨지는 수의 문양은

반드시 소장각이죠.


일상복으로 입는 베트남 여성들의 아오자이

전통의상이 일상복으로도 파티 의상으로도 참 많이 활용되는 나라입니다.


MISS EARTH VIETNAM 2022 아오자이 컬렉션


자수 기법만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의복 문화에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내온 청나라 시대의 치파오와 베트남의 아오자이는 꽤 닮아 있습니다. 만주족이 말타기와 활쏘기 등을 할 때에 편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치마에 옆 트임을 주어 실용성과 여성미를 강조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의 영향을 받고 베트남의 고유한 디자인을 더하며 발전해 온 아오자이는 예쁘고도 실용적인데 걸을 때마다 허리가 드러나는 절개선의 섹시함까지 더한 디자인 덕택에 지금까지도 실생활에서 많이 사랑받고 있습니다.


부유한 가문의 왕실 여성들은 장수를 기원하는 복숭아, 다산의 축복을 의미하는 구아바, 소녀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꽃과 풀 등의 문양이 정교하게 수 놓인 고급 실크 캐미솔을 입기도 했습니다. 여성의 상의 속옷 대용인 이 캐미솔은 뒷면에 금, 은 또는 구리 스트랩을 달아 세련미를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빈티지함이 묻어나서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올라옵니다. 이런 디자인은 너무나 슬기롭습니다.



이 캐미솔은 볼 수록 맘에 들어서 청바지에 이거 하나 걸치고 나가고 싶어 집니다. 대담한 패션의 나라 베트남에선 충분히 가능한 컨셉인데 우리 집 남자들이 시퍼런 눈빛만으로도 대문을 막아서고 남을 터라 문 밖을 차마 나서지 못하겠죠. 마음속으로만 입어봅니다. 그리고 혼자 괜히 행복해집니다.


자수의 매력으로 시작해 이 캐미솔 입고 싶다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단순한 본능 회로가 이걸 찾으러 가야겠단 생각에서 작동을 멈췄거든요. 같이 가실 분?







https://xqvietnam.com/tuoi-xe-chieu

https://vietnam.vnanet.vn/korean/tin-tuc/%E1%84%81%E1%85%AF%E1%86%BA-%E1%84%83%E1%85%A9%E1%86%BC-quat-dong-%E1%84%8C%E1%85%A1%E1%84%89%E1%85%AE-%E1%84%86%E1%85%A1%E1%84%8B%E1%85%B3%E1%86%AF-228392.html

https://bazaarvietnam.vn/khanh-van-cung-hon-phu-tren-tham-do-show-chung-thanh-phong/#post-2853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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