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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독백 Nov 07. 2024

연기속으로흐려지는것

#상상  #글쓰기  #자신의고유한존재까지도닦아내버리려는듯보였다  #연기속으로흐려지는것


그녀가 화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예전에 그의 후배라고 했던 여자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멈춰 섰다. 그녀가 그를 보러 화랑에 들를 거란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일이 끝났고 곧바로 이리로 출발하겠다는 메시지도 주고받지 않았던가. 그는 여자후배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고 여자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었다. 그도 여자의 볼에 입을 맞추며 환하게 웃었다.

며칠 동안 계속된 사소한 말다툼, 오래전에 접은 유학을 다시 생각해보라던 그의 말, 어디냐고 묻는 그녀에게 숨막힌다고 대답하던 날, 그가 어디서인지도 모르게 잃어버렸다는 반지, 늘 지친 듯한 그의 표정. 그녀는 불안했지만 오랜 연애 중에 겪을 수 있는 잠깐의 느슨함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화랑에서 그의 모습을 본 그녀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모든 게 그녀가 생각조차 하기 두려운 한 가지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을 늘어뜨렸다. 그가 좋아하는 알리움 꽃이 너울거렸다. 그녀는 화랑 밖으로 나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 갑자기 몸이 안 좋아서 집에 가려고.
(좋을대로 해.)
... 사람들 많이 왔어? 삼 년만에 여는 전시회인데.
(별로 안 왔어. 있잖아, 나 오늘 많이 늦을거야. 기다리지마.)
아.. 그래..

그가 전화를 끊었다. 문득 연애를 막 시작했을 무렵이 생각났다. 그는 상대방이 먼저 전화를 끊을 수 있게 배려함으로써 호감을 보인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전화를 먼저 끊으면 관계가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어서 대개 상대방이 먼저 끊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고. 그랬던 그가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전화를 안 받거나 먼저 끊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집으로 오는 길에 지하철역을 네 군데나 지나쳐서 반대 방향 열차를 타고 되돌아와야 했다. 내릴 땐 옆자리에 놓은 꽃다발을 챙기는 걸 잊었다. 보라색 꽃다발은 알알이 영근 포도송이처럼 의자 위에 놓인 채 멀어졌다. 지금쯤 그에게 안겨있어야 했는데.

자신과의 전화를 끊고 여자후배와 시시덕거리고 있을 그가 떠올라 그녀는 고통스러웠다. 약지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뺐다. 그와 사귀고 나서 7년의 시간 동안 그녀의 피부마냥 붙어 있던 반지였다. 반지가 놓였던 자리엔 하얀색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그가 보내온 신호를 여태 몰랐던, 어쩌면 모른척 해왔을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가 들어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무엇을 궁금해해야 하는지, 혹은 그가 혹시 이런 말을 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다. 아직도 여기에 있는거야?

이런 생각까지 들자 그녀는 방에 있는 그의 물건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한군데에 모아놓기 시작했다. 그의 피부가 닿았던 어떤 것이든 그녀의 손을 거쳐 바닥으로 던져졌다. 깨지고 부서지는 것이든 아니든. 그의 안경은 바닥에 부딪혀 알 하나가 떨어져나가고 대가 휘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새겨진 유리 시계는 벽에 맞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는데 귀퉁이가 으스러져 주변에 하얀 유리가루가 튀었다. 그와 함께 고른 쿠션, 그가 선물한 책, 그가 그린 그림들이 저주받은 것인 양 버려졌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생각난 듯 지갑 속에서 천천히 그의 사진을 꺼냈다. 양초를 가져와 불을 붙인 뒤 사진의 모서리를 불꽃에 가져다 댔다. 검은 실낱이 춤추듯 날아가고 사진은 점점 움츠러들었다. 불꽃이 손끝 가까이 이르도록 쥐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다. 그의 고유한 존재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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