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글쓰기 #그냥사랑에빠진거라고생각하기로했다
#비와연인
발에 닿는 차가운 공기에 눈이 떠졌다. 보니 그녀는 이불 위에서 자고 있다. 몸에 열이 많아 겨울에도 발을 내놓고 자는 그녀지만 기온이 영도 가까이까지 내려간 오늘 아침엔 추우려니 하고 그는 자기 쪽의 이불을 걷어다 그녀의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그녀는 기분 좋은 꿈을 꾸는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쩌면 꿈속에서 빗 속을 걷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는 웃으며 그는 창가로 갔다.
전날 두 사람은 일기예보를 보고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하루종일 비소식이 있을거라니. 이번에도 그들은 지붕이 통유리로 된 카페에 가기로 했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톡톡 떨어지는 모습과 소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라 그들이 좋아하는 장소였다. 언젠가 그들은 왜 이렇게 비오는 날에 들뜨고 설렐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어릴 적 비오는 날의 특별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빗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그는 빗물이 닿아 말갛게 변하는 세상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했다. 그들은 그냥 비와 사랑에 빠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비는 그런 두 사람을 끌어당겨 서로를 알아보게 했다.
우산도 뚫을 듯한 거센 비가 내리던 날 카페에서 창밖을 보고 있던 그녀는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한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신발과 바지는 물론이고 바람에 들이치는 비때문에 윗옷도 반 이상이 젖어있었다. 젖은 티셔츠가 등에 달라붙었고 체형이 드러났다. 가방을 젖지 않게 하려고 앞쪽으로 껴안고 있었는데 그것도 많이 젖은 듯 보였다. 그녀가 책으로 눈길을 돌리려는 찰나, 갑자기 그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그를 무심코 쳐다보았다.
그는 들고 있던 우산을 바닥에 그대로 내려놓았다. 움푹한 우산 안쪽에 가방을 던지듯 놓았다. 그러고는 '팀 로빈스'가 쇼생크 감옥을 탈옥해서 장엄하게 비를 맞는 것처럼 두 팔을 펴고 고개는 하늘을 향하고 한동안 서 있었다. 그녀는 웃음이 났다. 카페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이걸 봤을까 싶어 둘러봤지만 모두 일행과 대화하기에 바빴다. 그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묻고 싶어졌다.
비로 온몸을 적셔본 적이 없는 그녀는 궁금했다. 저토록 들이붓는 비를 맞는 느낌은 어떨까. 보는 사람에게는 청량감이 느껴지지만 정작 그는 한기를 느낄 것 같았다. 예상한대로 그는 꿈에서 깬 듯 눈을 뜨더니 가방과 우산을 챙겨 가장 가까운, 이곳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옷은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추운지 몸을 움츠렸다. 따뜻한 음료를 찾는 듯 카운터를 바라봤다. 하지만 몸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빗물이 그의 팔과 다리를 타고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주문을 하러 가지도 못하고 입구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서 들고는 가방과 음료를 챙겨 그에게로 갔다.
춥죠?
- 네, 많이 춥네요.
이거 걸쳐요. 아니 우선 그걸로 빗물을 닦아야겠네요.
- 아.. 감사합니다.
그녀는 그가 부탁한 핫코코아를 주문하고 직원한테서 마른 행주를 얻어서 그가 앉아 있는 입구 근처 테이블로 갔다. 장발의 느낌이 나는 갈색 곱슬머리에 큰 눈과 하얀 피부. 첫인상이 사슴 같았다. 비 맞은 사슴이라니. 두 손으로 코코아잔을 감싸쥔 그를 살펴봤다.
왜 그런 거에요?
- 네?
저런 장대비 속에서 과감하게 우산을 내려놓은 이유요.
- 아.. 네.. 비 오는 날 매번 이러는 건 아닙니다. 그냥 궁금했어요. 우산 쓰고 걷는 걸 좋아하는데, 오늘은 하도 많이 내리니까 옷도 많이 젖고 해서. 비야, 실컷 날 탐해봐라 한거죠.
난 무슨 영화 찍는 줄 알았어요. 쇼생크 탈출 아시죠? 남자주인공이 탈옥하고 나서 그러잖아요.
- 그러게요, 저 영화 찍었네요. 그런데 어쩌죠. 본의 아니게 눈 버리고, 옷 버리게 해서요.
하하.. 그럼 세탁해서 다음에 만날 때 주세요. 그리고 비 맞는 사슴은 처음 봤는데 나름 재밌었어요.
머쓱해진 그는 여전히 세차게 퍼붓는 장맛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녀는 그런 그를 미소지으며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