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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독백 Nov 06. 2024

그럼에도 우리는

#상상  #글쓰기  #아무것도받은게없는줄알았는데,모든게선물이었다  #그럼에도우리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받았다. 끊지마, 제발 끊지마. 그 순간 주변의 모든 게 증발해버린 듯했다. 그리움과 뒤섞인 채 그의 가슴 속에 묻혀있던 목소리, 그녀였다.

그는 현기증이 나서 집 앞 흔들의자에 맥없이 앉았다. 일 년 반 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오랜 기침, 검진에서 발견된 폐암, 그녀에게 숨기며 방사선 치료를 받던 일, 서너 달 후 여러 장기로 전이된 암, 그리고 그녀와 헤어진 일. 아니 그녀를 밀어낸 일.

그는 서서히 꺼져가는 자신의 시간 속에 그녀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이 세상 어디라도 함께 가자고 약속했지만 죽음에 이르는 길만은 아니었다. 육체와 영혼이 나뉘는 길 끝에 그녀가 외로이 서있는 걸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둘만이 아는 아름답고 연약한 곳에 가장 깊은 상처를 냈다. 서로가 서로에게 닿았던 순간들을 짓밟고 추억을 부숴버렸다. 그녀가 떠나가길 기다렸다. 살아갈 다른 이유를 찾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돌아오고 있다. 그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기침 섞인 한숨을 내쉬자 피어오른 입김이 흩어지며 그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가 두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그인 것을 더 확신하는 듯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기다려, 10분쯤 뒤면 도착해. 전화가 끊겼다. 그녀가 온다, 그의 마음 속은 함성으로 요동쳤다. 그는 운명을 믿지 않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거대한 운명의 파도가 그녀를 싣고 그에게로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몰라보게 수척해진 그녀의 모습에 그는 가슴이 조여왔고 뒤따라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그를 부축해서 집 안으로 들어가 눕혔다. 이제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의 눈이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를 따라 옆으로 누운 그녀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또한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아무것도 받은 게 없는 줄 알았는데, 모든 게 선물이었어. 그녀는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가까스로 삼키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을 그의 뺨에 대고 앙상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준 가장 큰 선물, 이라고 말하며 그녀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슬프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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