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1)고자비가 은근슬쩍 고자로 변해가던 때
나는 노래하는 유튜버이기도 하다. 격변의 겨울방학 이후 피폐해진 마음을 달래려 그즈음 채널을 개설했다. 죽을 땐 죽더라도 뭐라도 시도해보고 죽자는 심정이었다.
싸늘하게 삐어버린 그 아이의 눈깔에 살아야 할 의미조차 잃어버린 그날, 밤이 되어도 오지 않는 그 아이를 기다리다 죽으려고 찾아간 동네 다리 위에서 나는 득음을 해버렸다. 데뷔 무대엔 서보지도 못하고 죽는구나, 죽기 전에 딱 한 곡만 하고 뛰어내려야지, 했는데 소리가 너무 깔끔하게 나왔다. 한 곡 더, 한 곡 더. 뛰어내리려고만 하면 내 깊은 곳에서부터 익숙한 가사들이 그물에 걸린 은빛 멸치 떼처럼 그 의미를 반짝이며 올라왔다. 낮고 두꺼운 목소리의 특성상 포기해왔던 고음들이 정확하게 피치를 찍었다. 죽어라 연습해도 얼굴만 찌그러질 뿐 표현하기 막막했던 '한'. 그 한이란 게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겨울방학 이후 목이 굵어지면서 소리가 단단하고 깊어진 듯했다. 가슴통이 넓어져 폐활량 또한 상당히 증가한 듯했다. 몇 번을 불러봐도 나 혼자 듣기엔 아까운 울림이었다. 그래, 데뷔는 해보고 죽자. 나는 그 아이를 죽을 만큼 사랑했지만 당장 죽을 만큼 사랑하진 않았다.
내 채널 속에서 나는 뒤통수만 공개한 채 노래를 한다. 뼈를 깎는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막상 채널을 개설하고 보니 엄청난 압박감이 밀려왔다. 갑자기 얼굴이 알려지고, 유명 유튜버처럼 발가벗겨지고…… 빡빡한 일정과 숨 막히는 유명세를 어찌 감당해 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상황에 그 스케줄을 무리 없이 소화하긴 힘들 듯했다. 사람들은 커진 내 겉모습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혀를 칼처럼 휘두르며, 그들은 그들의 입맛에 맞게 나를 요리해버릴 테니까.
한 명 한 명 붇기 시작한 구독자는 991명. 한 명만, 열 명만, 백 명만 하던 게 천 명 돌파를 앞두고 있다. 무려 2년 6개월째. 구독자는 처음에만 바짝 늘었다. 어쨌든 그중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연예 기획사 대표님의 최측근도 포함되어 있다. 연예계 짬밥 20년 차라는 그는 역시나 매의 눈과 소머즈의 귀를 가진 분이었다. 종종 군인으로도 오해받는 쇼트커트를 보고도, 득음 뒤 더욱 깊어진 초저음 발성을 듣고도 그분은 내가 여자인 걸 단박에 알아챘다. 유망주 발굴이 주 업무라는 대표님의 최측근은 비밀 댓글을 통해 나를 캐스팅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현재 아이돌의 세계를 한 방에 평정해버릴 특이한 목소리군요. 디테일을 대충 다듬어보면 되겠어요. 외모는 보나 마나 조목조목 다듬어야 하겠지만요. 접힌 뒷목살 같은 건 본인 의지로 얼마든지 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스크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이쪽은 데뷔 전 성형이 필수인 세계입니다. 중간이라도 가야,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대중은 단순하고 공격적이니까요. 본 기획사 이름을 대면 부모님께서도 흔쾌히 허락하실 겁니다. 그때, 비밀 대댓글 주세요. 바로 계약하시죠. 드문 기회라는 걸 명심하세요. 아, 오디션은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단 하나의 게시물로도 충분했으니까요.
PS. 단, 기본 성형 비용 700만 원은 계약 전 반드시 일시금으로 납부되어야 하며, 본인 사정에 따른 추가 견적 비용은 분할 납부가 가능합니다.』
다이어트와 성형, 만져본 적 없는 거금, 거기다 다모증 완치까지. 아무리 계산을 때려봐도, 실력과는 무관한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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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뒤통수만 공개하기로 마음먹게 된 데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식구들의 반응은 부담 그 자체였다. 괜히 말했다 싶었다. 이왕 태어난 거 데뷔는 해보고 죽겠다는 한마디에 식구들은 첫 영상도 찍지 않은 내가 벌써 스타라도 된 양 호들갑을 떨었다.
목청 짱짱하던 새내기 수녀 시절 잠시 잠깐 성가대 소프라노를 역임한 사수는 약 2주라는 그 찰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 노래를 검토해주었고, 고대로는 장비 지원과 함께 손발 오그라드는 진지한 영상 제작과 편집을 맡아주었다. 도다리는 날마다 손님이 넘쳐나는 '외국인 노동자 센터'를 운영하면서도 내가 최상의 컨디션에서 노래할 수 있도록 그 외 모든 잡무를 도맡았다. 찾아오는 각국의 노동자들에게 아직 게시물도 없는 내 좌표를 뿌렸다. 미래의 월드 스타는 노래만 하라면서. 학문으로는 이미 가망 없지 않냐면서. 힘이 나는 댓글과 곧 통장에 쌓일 짭짤한 수익은, 퇴소한 내게 영양가 풍부한 토양이 돼줄 거라면서. 몸과 마음이 다쳐, 당장 생계를 꾸리기 막막해 센터를 찾는다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과연 몇 명이나 내 채널을 구독했는진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어찌어찌 그렇게 첫 영상이 탄생했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꼭 성공해야 할 것 같았고, 그러려면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하지만 딱 그때였다. 골격이 속수무책으로 굵어지던 때. 타인의 성별 감별이 막 시작되던 때. 고자비가 은근슬쩍 고자로 변해가던 때. 중2 때도 같은 반이 된 그 아이의 정수리를 별수 없이 날마다 굽어봐야만 했던 때.
뒤통수는, 나의 돌파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