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가장 즐거웠던 시간
기대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배반하는지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금방 체험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와 살고 있는 '가족'은 결혼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세상 걱정 없이 해맑게 산다. 변함없이 행복하게 쭈욱 잘 살고 있다.
삶을 행복하게 사는 데 도가 튼 이 사람은 성품까지 좋았다. 결혼 전에 데이트 약속을 잡을 때도 공손하게 내 일정을 먼저 생각하고 식당에 가서 메뉴 선택을 할 때도 항상 내게 먼저 물어봤다. 그 정도로 늘 상대를 배려했다. 가급적 음식도 내가 선택한 것으로 자신도 먹었다. 우동에 있는 그 맛있는 유부 주머니도 자신은 먹지 않고 내 그릇에 먼저 퐁당 떨어뜨렸다. 한마디로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걱정 근심이라곤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렸는지 잘 놀고 평온했다. 속이 없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웃을 때면 목젖이 다 보일 정도로 맘 놓고 웃었다. 놀면 노는 대로 일하면 일하는 대로 그 순간에 충실하며 잘 살았다. 말하자면 걱정이라곤 없는 사람이었다. 일 하는 시간이 짧아서 문제였지만 사람이 좋아서 그건 크게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근심 걱정 없는 이 사람이 제일 못하는 것이 바로 거절이었다. 상대를 지나치게 배려해 자기 할 일이 있어도 바빠서 못 간다는 말을 못 했다. 친구들과 노는 것도 그 친구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서 조절하는 데 애를 먹었다. 아니 아예 조절을 못했다. 아주 성실하게 지속적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가정 경제에 위험 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일을 망쳐 버리기 전까지 끊어내지를 못했다. 마침내 빨간 신호등이 켜져 수습이 안 될 정도가 되어서야 강제로 멈춰졌다.
아이들처럼 밤늦게까지 몰려다니면서 "우리가 남이가"를 부르짖었던 친구들이, 어깨동무하며 다니던 그 친구들도 순둥순둥한 우리 '가족'이 어려워지자 하루아침에 남이 되어 버렸다. 그토록 견고했던 끈끈한 관계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저절로 청산이 됐다.
사실 우리 '가족'은, 단점을 말하기에는 장점이 더 많은 사람이다. 나의 부모님께서는 배려의 아이콘인, 딸의 남자 친구가 조금은 못 마땅해 보였나 보다. 항상 당신 딸인 나의 판단에 맡기고 기다려 주는 것이 느리고 굼떠 보였는지 우리 집에서는 '늘낙지'로 통했다. 늘어진 낙지처럼 흐물흐물 여자가 하자는 대로 뜻을 다 받아준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아무튼 사람으로서는 꽤 괞찮은 편에 속했다.
이런 장점이 내 발목을 움켜잡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장점이 나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선택지가 너무도 없었다. 그저 내 발등을 찍고 통탄하며 내가 한 선택을 증오하는 수밖에.
서울 토박이인 내가, 일부 사람들이 편견을 갖고 보던 그 지역의 남자와 결혼할 때 시골의 이모들은 혀를 찼다. 예식장에 와서 결혼하는 신부에게 축하보다는 한심하다는 듯 수군거렸다. 수군대던 이모들 사이에 급기야 큰 이모가 용기 있게 나섰다.
"너는 딸을 헛 키웠어. 계집애를 쓸데없이 대학이나 보내서 연애질이나 하게 했다"고 친정어머니를 책망했다. "집안에 부리는 사람도 우리 집에서는 그 지역 사람을 들이지 않는데, 어쩌자고 집안에 들였냐"며 날을 세웠다.
호기롭게 결혼을 강행했지만 결혼 생활 내내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궁핍했다. 그 당시 친정은 자전거포를 크게 하고 있어서 먹고 사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가게에 일꾼을 서너 명이나 둘 정도로 자전거포가 잘 됐다. 그 시절의 나는 아침이 되면 돈은 항상 들어오는 줄 알 정도로 가난에 대해 무지했다. 왜냐하면 자전거포는 문만 열면 자전거를 고치러 오거나 사러 왔기 때문에 항상 돈 구경하기가 쉬웠다. 새 아침이 밝아 오면 새 돈이 준비한 듯이 날아 들어왔다.
'가족'은 결혼할 무렵에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독립을 했다. 우리 '가족'은 남에게 아쉬운 소리 못하고 싫은 소리는 더더욱 못하는 성격이었다. 사업가 기질이 없던 탓에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곧 어려움에 처했다. 결혼과 동시에 경제적으로 어렵다보니 집안에 여자 하나 잘못 들어와 남정네 일이 안 풀린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신혼을 보냈다. 하루하루 살기가 어려워도 어렵다는 말을 못 하며 전전긍긍했다.
저녁이면 봉지쌀을 사서 갖고 들어왔는데 빈손으로 들어오는 날도 꽤 많았다. 돈이 없으면 굶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함께 살면서 처음으로 경험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서로에게 들릴까 봐 TV를 크게 틀어놓고 봤다. 점심에 먹은 게 잘못됐는지 속이 안 좋다는 이유를 대며 물만 여러 잔 마시며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내 사랑에 대한 선택이 조롱받지 않도록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매일매일 살아내는 것이 고통이었다. 물론 시골 소년 같이 순박한 이 남자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부자가 되고 싶어 했지만 돈은 이 사람을, 아니 우리를 싫어하다 못해 잊어버렸다.
천하태펑인 '가족'이 살면서 단 한번 온 힘을 다해 한 일이 있다. 바론 결혼이었다. 결혼하기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춘천의 '이디오피아의 집'에까지 가서 청혼을 할 정도로 '가족'은 적극적이었다. 강물에 출렁이던 크리스 마스 이브의 반짝이던 트리는 밤물결과 어우러져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찻집 안에는 엘튼 존의 Tonight이 흐르고 있었다.
엘튼 존이 Tonightg~ 하며 음을 끌자 실내는 금방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The man who'd love to see you smile tonight"(네가 오늘 밤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
내가 듣고 싶어 하던 말을 엘튼 존은 꿈결처럼 대신해주고 있었다. 아무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가족'은 윗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나랑 결혼하면 3층 양옥집에서 살 거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당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부터 새까만 바둑돌들을 졸졸하니 박아서 비가 와도 신발에 흙이 묻지 않게 살게 해 줄 거라고 했다.
당시의 남자들이 청혼할 때 하는 말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해 주겠다"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신발에 흙이 묻지 않도록 해줄 거라는 창의적인 발언을 했다. 이때 바로 알아봤어야 했다.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것을. 근데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 말이 제법 듬직하게 들렸고, 속이 깊어 보였다. 지내놓고 보니 그때 나는 보고 싶은 대로 그냥 믿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결혼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 생활이 어려워져서 그런지 '이디오피아의 집'에서 청혼할 때의 그 남자는 어디에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찬찬하고 잘 웃던, 섬세한 성품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수가 줄어든 생활에 지친 남자만 남아 있었다.
어디에다고 기댈 데가 없었던 내가 의지할 곳은 책밖에 없었다. 가족이 잠든 밤이면 살그머니 나와 새벽까지 책을 보며 글을 썼다.
동트기 전의 어둠이 가장 캄캄하다며 곧 새벽이 올 거라며,
찬란한 아침 해가 반드시 뜰 거라며 주문을 걸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기억하도록 공책에 지극정성으로 썼다. 신문에 실린 칼럼을 보며, 독자 투고란의 글을 읽으며 내 생각을 풀어냈다. 학창 시절처럼 좋은 글을 공책에 베껴 쓰면서, 꼬박꼬박 공책에 빼곡히 써 내려갔다.
한편으로는 돈이 되는 일은 다 찾아서 했다. 00전자의 모니터링도 하고 글과 관련된 일이나 공부와 연관된 일들을 찾아서 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내 역량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은 한정돼 있었다. 좀 더 확실한 꿈을 이뤄내기 위해 도서관을 내 서재처럼 이용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보면서 꿈을 키워 나갔다.
도서관에서 하는 좋은 강의들을 찾아다니면서 들었다. 도서관의 비디오 자료실에서 <대영박물관>에 있는 회화 자료에서 조각품까지 샅샅이 공부하며 정리를 했다. 돈 주고 사서 보기에는 너무나 비싼 좋은 자료들을 이 시기에 다 찾아서 봤다. 몇 년에 걸쳐서 도서관에 있는 영상자료들은 거의 다 볼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신문 한 귀퉁이에 교수님들의강연이 있으면 그것 역시 놓치지 않고 찾아다니며 듣고 기록했다. 내가 처한 환경에서 꿈을 향해 계획을 세우며 작은 실천들을 하며 차곡차곡이뤄나갔다.
사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독서였다. 도서관을 다니다 어느 날 '움직이는 도서관'이라고 쓰인 봉고차를 발견했다. 낙도나 어려운 지역에 두 달에 한 번씩 300권의 책을 도서관에서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도서관장님을 찾아가 우리 동네가 처한 환경을 설명하면서 낙도보다 더 열악하다고 강조를 해 마침내 우리 집에서 움직이는 도서관을 운영하게 됐다. 영아부터 성인까지 읽을 수 있는 책들이 두 달에 한 번씩 바꿔가며 왔다. 이웃의 소금과 빛이 되어 도서관을 운영하겠다고 했지만 책을 읽으러 오는 아이들이 많지를 않았다. 결국 나와 우리 아이들만 원 없이 책을 읽었다.
독서 습관을 잡아주기 위해 아이들도 책을 읽고 나면 간단하게나마 독서록을 쓰게 했다. 나 역시 책을 읽고 나서는 짧게나마 감상평을 썼다. 읽기와 더불어 행한 글쓰기는 나를 절망에서 구원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동안은 내 비루한 처지를 잠시나마 잊어버릴 수 있었다. 글을 쓰다 보면 고요히 마음이 가라앉아 슬픔도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내 인생 가장 즐거웠던 기억은 끊임없이 내게 주문을 걸던, 내 삶의 가장 막막했던 여명의 시간이었다. 읽고 공부하며 글을 쓰며 아침이 밝아 오기를 기다리면서 나의 삶도 밝게 빛나기를 소망했다.
내 생애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오히려 사방이 콱 막혀 옴짝달싹 할 수 없다고 생각되던 그 암울한 시기 였다.
이제 내게 있어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과거형에 머물러 있지 않다. 동이 틀 때까지 책을 보고 글을 썼던 그 시간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읽고 쓰면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