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 분리만 잘해도 행복은 떼어놓은 당상이다
넷플릭스의 미드로 영어 공부하는 모임을 하게 되었다. '넷 미인'이라고 하는 모임인데, 미드뿐만 아니라 HBR도 권장한다. 영어 꽤나 한다는 사람들은 HBR(Havard Business Rivew)까지 찾아서 공부하는 모양이었다. 월 세 편을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는데, 독해 수준이 중학교 정도도 안 되는 내게는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종이 위에 까만 점들이 점점이 박혀있다가 바둑돌 하나 눈에 띄듯 간간이 아는 단어가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런데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읽을 자료가 없다고 애를 태웠다. 남의 어려움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얼른 일을 저질렀다. HBR에서 시험 삼아 한 편 다운로드한 것 것을 깜박하고 세 편을 받은 것이다.
받고 나니 무료로 월 세 편 제공하는 것은 다 찼으니 더 받은 한 편 값은 비용을 지불하라는 내용이 떴다. 그 내용도 사실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구 저런! 이게 무슨 일이람. 당혹감이 몰려왔다. 그 내용을 본 순간 겁이 나서 그냥 빠져나왔다. 구글에서 어떻게 나한테 비용을 청구할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열심히 공부하려는 사람들 돕겠다고 나서다 황망한 일을 당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비용을 지불하라는 그 내용도 제대로 해독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대충 first name이랑 last name 쓰고 ~ 어쩌고저쩌고 쓰는 칸이 많았는데, 하여간 무서워서 도망치듯 나와버렸다.
카톡에 HBR에서 받은 읽기 자료 세 편을 올리고 나서
"제가 월초에 한 편 받은 걸 잊어버리고 더 받았어요. 근데 비용을 지불하라는 데요. 어쩌면 좋지요?" 했더니
어라 어떻게 받으셨어요. 세 개 넘으면 안 되던데 ㅎ
설마 지불하신 건 아니죠
겁이 나서 그냥 엉겁결에 줄행랑을 쳤다니깐욧~
잘하셨어요.
으잉 어찌 더 받으신 거지. 노하우 ㅋ
지불하는 방법도 몰라서 얼떨결에 쏙 빠져나왔다고 하니 열공하는 00님 왈
잘하셨어요~^^
실속은 없이 남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거나 하면 무턱대고 나서서 하는 심리란 무엇에 근거한 건지 원~ .
내가 나를 봐도 잘 모르겠다. 미드 모임에 들어간 이상 아들러가 말하는 '타자공헌'이라도 하고 싶었나 보다.
공동체, 즉 남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라고 느끼는 것.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라고 느끼는 것.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 -<<미움받을 용기>>, 236쪽
HBR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공동체 감각을 지니기 위한 타자공헌을 하려다 일어났다. 아들러를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인간관계를 성공적으로 하기 위한 출발은 과제 분리로부터이다. 과제 분리를 실패하는 경우는 자신의 과제를 남에게 떠넘기거나 타인의 과제에 개입을 하게 된다.
영어 잘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읽기 위한 과제에 쓸데없이 개입했다가 가슴 한 켠을 쓸어내렸다. 반면에 자신들의 과제를 타인에게 떠넘기는 사례를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된 <종이집을 팔아드립니다>에서 볼 수 있었다.
김수영의 <종이집을 팔아드립니다>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2/31/2019123101415.html?utm_source=naver&utm_medium=original&utm_campaign=news
브이로그 '종이집'의 주인장 수인은 값도 매기지 못하는 종이집을 브이로그에서 판다. 현실 속의 수인은 진짜 집을 사고파는 '승리' 부동산에서 사무보조로 일하고 있다. 말을 더듬는 수인은 세상과 맞서 싸워 이기려는 승리 부동산에서 부지런히 종이집을 만든다.
이런 수인에게 '종이집'을 오픈한 지 육 개월 만에 다섯 채를 납품해 달라는 주문을 받는다. 그것도 하루에 한 채씩,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집으로.
"전세 6.5억, 급매 15억 조정 가능, 월세 4 억에 60, 급 월세 1억에 100" 등 부동산 유리창에 붙은 숫자들을 보면서 '억'이라는 숫자가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 같다고 느낀다. '억'이 흔한 세상에 수인의 방세는 월세 20만 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화장실 안쪽에 붙은 2.5평짜리 쪽방이 수인의 방이다.
말을 더듬어 면접도 실패하고 온 날 병원을 찾지만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며 심리치료를 추천받는다. 치료 대신 수인은 종이 접기를 선택한다. 쪽방 가득 종이집이 가득해지자 종이집에 끈을 달아 줄에 건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예보에도 부지런히 종이집을 만든다.
수인에게는 자신의 과제를 분리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떠넘기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수인의 아버지와 수인의 승리 부동산 사장,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수인에게 반복적으로 질문을 하면서 수인을 힘들게 한다.
수인의 아버지는 돈이 떨어지면 전화를 한다. "수인아, 어디 있니?"를 반복한다.
목수인 아버지는 컨테이너에서 쓰던 가스버너가 터져 오른손 엄지와 중지를 잃어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화상으로 얽은 얼굴 때문에 두문불출하며 지낸다. 밖으로 나올 때는 돈이 떨어져 수인에게 전화할 때뿐이다. 30년이 넘도록 듣는 "수인아, 어디 있니"라는 말은 수인을 넌덜머리가 나게 한다.
승리 부동산의 사장은
"이름이 필요한데. 수인씨. 주민 등록 이전했던가? 이름값이 꽤 붙을 거 같은데 부담은 갖지 말고" 하면서 수인을 압박한다.
집도 없는 수인은 이름마저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의문을 갖는다. 부동산 사장은 "이름은 생각해 봤어요?" 재차 채근을 하며 묻는다.
키우던 열대어 무니도 죽고 태풍으로 컨테이너가 이리저리 흔들리다 옆으로 쓰러지며 종이집도 무너져 내린다. 찢기고 떨어져 나간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집'을 수인은 가슴에 안는다. 허리를 접고, 무릎을 접으며 천천히 종이집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종이집의 수인도 나름 과제 분리를 한다. 비록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아버지의 전화를 받지 않는 것으로, 부동산 사장의 요구에는 머뭇거림으로 대응을 한다.
말을 더듬느라 제대로 된 답변을 못하는 수인은 앙팡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앙팡 anfant은 아직 말을 못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직까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수인이 이에 해당한다. 적절한 응답을 못하는 수인에게 태풍이 적합한 답지를 안겨주는 것은 어찌 보면 예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내가 지혜롭게 했어야 하는 것은 "과제를 분리"하는 것이었고, 수인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의 과제를 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임으로 해서 나 스스로가 공동체에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뿌듯함은 있었다. 타자신뢰를 바탕으로 한 타자공헌에 이르렀으니 그것으로 만족한다.
종이집의 수인이 타인의 과제를 버리는 과제 분리만 잘했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좀 더 행복하게 잘 살지 않았을까 상상을 해본다.
과제 분리만 잘해도 행복은 떼어놓은 당상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