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쉽게 살아온 거 같아요

봄!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by 진순희

늦은 밤, 아닌 신새벽이라고나 해야 할까. 실직한 아들이


"그동안 나는 쉽게 살아온 거 같아요" 술기운이 돈 채로 내게 말을 했다.


구직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네가 잘못 살아온 게 아니었어. 그리고 쉽게 살아온 것도 아니고." 했더니


"아니에요. 쉽게 살아온 거 맞아요. 왜 지금까지 안 주무셔요. 얼른 주무셔요."

하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뒷모습이 제일 쓸쓸하다고 했던가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의 아들의 등이 구부정해 보였다.


"명심해야 할 것은 네가 너 자신한테서 문제를 찾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잘못이 아니야. 너를 그렇게 만든 그들 잘못이야."


마음속으로만 삼켰다. 풀이 죽어서 자신에게 잘못을 돌리는 지금보다는 차라리 잘 나왔다고 큰소리칠 때가 더 나았다.

고양이.PNG <일하느라 제대로된 여행한 번 못했구먼>


아들이 잘 다니던 대기업에서 외국계 기업으로 옮기게 된 것은 순전히 전 직장의 상사 때문이었다. 이직해서 억대 연봉을 받으며 승진까지 했다며 아들의 이직을 부추겼다. 평소 신중한 성격의 아들 답지 않게 빠른 결정을 했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일사천리로 진행을 했다. 아마 아들을 움직인 것은 6시 정각에 퇴근한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간에 아들은, 일의 특성상 새벽에 출근해 거의 자정 무렵에 집에 들어올 정도로 퇴근이 늦었다. 말하자면 출근은 일정한데 퇴근이 분명하지가 않았다.


영어도 최고의 점수를 받을 정도로 지필 실력도 좋았지만 영화를 오랫동안 봐와서인지 회화 실력도 유학 갔다 온 다른 직원들보다도 잘한다고 했다. 외국인이 오면 아들이 다 처리를 했던 모양이었다. 한 해에 네 명이 퇴사할 정도로 사장이 직원들을 들들 복았다고도 했다. 아무튼 사장과의 불화로 직장을 잃게 됐다. 문제는 사장을 제외한 5명의 인원이 충족이 되어야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먼저 그만둔 직원들 때문에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아무런 보호 없이 속수무책으로 실직을 하게 됐다.


"네 잘못이 아니야"를 속으로 삭히며 엄기호 교수님의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에서 말한 "어른"을 떠올렸다. 이 책의 <경험이 죽었다>에는 여자 친구와 헤어진 선식의 얘기가 나온다.


엄기호.PNG <출처: 다음 책>


선식은 고등학교 때부터 5년 넘게 사귄 '오래된 연인"한테 느닷없이 차였다. 헤어지자는 이유가 뜻밖이었다. 굳게 믿어왔던 여자 친구는


"넌 섹스할 때 세 군데만 만지잖아."


헤어진 이유가 그거였다.

엉겁결에 "아니, 그럼 세 군데 말고 또 어디를 만져야 한다는 거야?' 라고 묻는 선식에게 여자 친구는 픽 웃더니, 그래서, 그래서 내가 헤어지자고 하는 거라며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고 떠나버렸다.


선식의 상황에 주변의 반응들은 거의 비슷했다. "여자는 많다", "또 다른 사랑이 곧 찾아올 것이다"라는 류의 비슷한 말들을 쏟아냈다. 울면서 하소연하는 선식에게 친구들의 성토는 이어졌다. "다른 데 만져주길 바랐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말은 안 해놓고 너보고 알아차리라는 게 말이 되느냐"며 전 여자 친구를 헐뜯었다.


술에 취한 아들을 붙잡고 선식의 어머니는 길길이 뛰었다. "세상의 절반은 여자니까 더 좋은 여자가 나타날 거"라는 어머니의 말도 선식의 슬픔을 위로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에 비해 아버지는 달랐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아버지는 섣불리 위로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차였다며?" 말하는 아버지 앞에


"네, 근데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자기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준 것 같은데, 이제 와서 저한테 왜 이러는 거죠?"


눈물을 떨구는 선식에게 "원래 여자란, 모르는 거야."라는 말을 한다. 그 순간 선식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다. 절대 알 수 없는 존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을.


오히려 아버지는 선식에게 잃어버린 것은 다시 찾을 수 없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대신 다음에 또다시 하나뿐인 무언가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지혜'를 전달해주었다. 어머니의 가짜 위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진짜 지혜가 선식에게 삶에 대한 깨달음을 준 것이다.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101쪽


체험이 개인 각자가 하는 거라면 경험은 각자가 한 체험을 전수할 수 있다는 특성이 있다. 그런데 저자는 경험만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경험이 삶에 대한 깨달음이 되려면 '어른'이 필요하다"라고. 세상을 먼저 경험한 어른의 지혜를 '한 수' 배울 때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좋은 어른의 표상은 또 있다. 영화 <굿 윌 헌팅>의 MIT의 청소부인 수학 천재 윌에게 숀 멕콰이어 교수가 그 예이다. 입양과 파양을 거듭하며 양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려 강퍅해진 윌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냉소적이고 공격적이었던 윌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간의 응어리를 다 풀게 된다. 영화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좋은 어른이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상대의 좋은 가능성을 찾아주는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 수 있다. (good will hunting)


취업.PNG 누가 일할 권리를 빼앗는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취업 시장의 문도 굳게 닫혀버려 아들의 구직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사람이 살면서 시절 운도 무시 못하는데 코로나 19 같은 유행병까지 번져 취업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산 넘어 산이다. 악재도 이런 악재가 없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 단단히 먹고 몸을 추스르는 게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함을 느낀다.


선식의 아버지처럼 숀 교수처럼 나 역시 제대로 된 어른이고 싶다. 아들이 좌절하지 않고 끈기를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경험을 전수해 지혜를 주는 어른 말이다.

행운은 그때 그곳에서 그 사람을 만날 때 완성된다고 한다. 아들에게 참된 어른을 만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행운이 오기를 소망한다.


삼월, 봄이다. 곧 꽃 피고 잎이 무성한 여름도 오겠지.

아들아, 썩은 물 웅덩이에 빠졌던 발을 얼른 훌훌 털어내고 일어나거라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봄처럼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캡처.PN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