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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Feb 12. 2021

내 남편은 만만한 아들이었습니다

세상엔 공짜가 없듯이 돈독한 관계도 투쟁을 통해 가능했다.

나는 시댁의 봉이었다는 글을 브런치에 올린 지 몇 시간이 되지 않아 조회수가 100000을 넘었다는 알림이 왔다. 댓글로, 메일로 많은 분들이 연락을 주셨다. 모두들 봉 노릇 하는 것에 지치고 억울하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때는 그러한 상황을 이해 못하는 자신이 속상하고 답답하다고 토로하는 독자분도 있었다. 다른 형제들한테는 돈 얘기 꺼내지도 못하고 자기 남편한테만 돈 얘기를 꺼낸다고도 했다. 우리 집 상황이랑 너무나 똑같았다. 심지어 아무 얘기나 시어머님이 내 남편만 붙잡고 한다는 하소연을 했다. 내 남편이 여전히 호구고 봉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우울하다는 메일도 왔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고 우리 시어머님은 돈 얘기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일까지도 시시콜콜 남편한테 전화를 했다. 살아생전에 남편은 아들 육 형제 중 제일 만만한 자식이었다. 궂은일에만 동원되는 아들이었기에 그 아들의 아내인 나도 만만한 며느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자기 부모라면 끔찍이 여기는 남편 덕분에 시댁엘 가도 남들보다 일찍 서둘러서 가고, 다른 형제들이 다 돌아간 뒤에 늦게까지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골엘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도시 출신인 내게 시댁 가는 길은 난이도 높은 수학 문제를 푸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아니 도살장 끌려가는 것보다도 더 부담스러웠다. 오죽하면 명절 기간에는 시댁에 못 갈 정도로만 살짝 아팠으면 하는 소원을 빌 정도였을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자식 없다는 말도 내 남편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어머님은 내 남편을 이물 없다고 함부로 해도 되는 아들인 줄로만 아셨다. 어쩌다 가야 되는데 남들보다 일찍 가서는 늦게까지 머물러 있고, 자주자주 얼굴을 보여주는 아들이 뭐가 그리 귀할 게 있었을까. 지내놓고 보니 시어머니의 입장도 십분 이해가 가긴 했다.  



남편이 만만한 아들로 대접받는 것은 시어머니의 편향된 자식 사랑에도 있었지만 남편의 탓도 컸다. 남들은 조금만 뭔가를 해도 그것을 포장해서 마치 큰일이나 해낸 것처럼 하는데, 남편은 그걸 못했다. 자기가 한 일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해버렸다. 자기 몫을 잘 챙기지 못하다 보니 어머님께서는 유독 내 남편에게만 막 대해도 되는 줄 알고 계셨다.      



명절마다 꼬박꼬박 놓치지 않고 가는 우리와 달리 막내네는 어쩌다 왔다. 안 오는 날이 더 많았다. 꼭 갈 거라고 약속을 해놓고 막상 오지를 않았다. 그 이유가 가당치도 않았다. 길이 막혀서 화증머리가 나 운전대를 돌렸단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시어머니께 막내 동서가 무심한 듯 웃으며 전화했다.    

  


어머니~~ 이이 가요, 길이 너무 막힌다고 짜증을 내더니 차를 돌려버렸어요. 그래서요, 저희 그냥 집으로 가고 있어요. 아이 참~~   어머니 명절 잘 쇠셔요.     


이러고 끊었다.   

   


우리 가족은 며칠 전부터 언제 올 거냐고 전화를 하시고 조금만 늦어도 애를 태우셨다. 중간중간 휴게소에서 어디쯤이라고 행선지를 꼭 알리는 전화를 드렸다. 아마 우리 가족이 막내네 식구들처럼 했으면 불호령이 떨어져도 몇번은 떨어졌을 거다. 시어머님은 원래 거침이 없으셔서 장성한 자식들한테도 스스럼없이 욕을 잘했다.      



내 남편 제대로 세워주세요    

 

물러 터진 신랑은 어머님이 함부로 해도 찍소리도 못하고 그 소나기를 다 맞고 살았다.

그날도 시누이 가족도 있고 다른 형제들도 마당에서 술을 마시며 놀고 있었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기보다 산으로 들로 쏘다니기를 더 즐겨했다. 시댁에 나를 내팽개쳐놓고 산으로 하루 종일 쏘다니다 다 저녁때 마당엘 들어섰다. 산 봉우리를 몇 개를 넘었다고 했다. 점심도 쫄쫄이 굶고 산을 타고 왔는지 몰골이 꾀죄죄했다.


들어서는 남편에게 "아이고 저 화상 하고는. 하루 종일 뭐하느라 집구석엔 들어오지도 않고 쏘다니냐!" 하시더니 혀를 찼다. 고향엘 내려왔으면 부모 형제들이랑 놀아야지 어딜 싸돌아다니냐고 했다.     

평소의 어머니답긴 했지만 그날은 친척들도 있고 시동생이나 손 아래 시누이들 가족도 있었다. 시어머님이 막말을 하니까 매제인 최서방도 “아따, 형님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셔잉”


그 상황을 보는 순간, 심장이 벌렁거렸다.  놀고 온 것은 그틀과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단지 밖에서 놀 뿐이고 그이 형제들은 안에서 논 것만이 달랐다.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주위를 둘러보니 내 아들 둘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가 할머니한테 싫은 소리를 듣고 있고, 모르긴 하지만 작은 아빠나 고모부가 아빠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나 보다. 큰 아들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아이랑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당 한구석에 앉아 일을 하고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정색을 하고 최서방을 쏘아봤다. 움찔하면서 “처남댁, 형님이 산에 예쁜 각시 몰래 숨켜두고 다니는갑소” 하면서 자리를 떴다. 붉으락푸르락하는 내 얼굴을 보면서 친척들도 일어서고 형제들도 이웃 마을로 마실 간다며 사립문 밖으로 나갔다.  남편도 두 아들을 데리고 쭐래쭐래 고샅 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부엌으로 가려는 어머님을 불러 세웠다.


어머니 제 남편만 놀다 온 거 아니에요. 여기 있는 형제들도 다 놀고 있었어요. 제 남편만 닦아세우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저한테 말씀해보세요. 잘못했으면 제가 고치도록 애비한테 말을 하겠습니다.  

친척들과 형제들 앞에서, 그것도 애비 동생들이잖아요. 형의 위상을 어떻게 깡그리 망가뜨릴 수가 있어요. 게다가 아들들 앞에서 애비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 우리 아들들은 아빠는 할머니한테 맨날 혼이나 나는 사람으로 알 거 아니에요.


오히려 산으로 들로 놀러 갔다 온 제 남편이 낫지요. 일도 거들지 않으면서 술상이나 봐오라는  일은 안 시키잖아요. 제 남편이 부모한테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데 바깥 세상에서 무슨 인정을 받고 살겠어요. 애비가 돈 못 버는 거 그이 탓도 있지만 자식을 깔아뭉개는 어머니 탓도 큽니다.


저 다시는 여기 안 옵니다. 어머님 아들뿐만 아니라 제 아들들도  두 번 다시 못 보실 거예요.

아이들 교육상 제가 못 가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짐을 주섬주섬 싸고 차 키를 갖고 마당으로 나섰다. 어머님은 설마 이 밤에 나갈 줄은 모르셨는지, 깜짝 놀라서 마당으로 나가는 내 팔을 붙잡았다.

      


아들들 중에서 쟈가 제일 이물이 없어 야. 그래서 그랬어 야.
너는 서울 사람이라 이해를 못하나 분데, 우리는 이러고 살아 야.
이건 아무시렁도 안 한 디, 니가 괜히 쓸데없이 일을 크게 키우는구먼.  

    

남편이랑 살면서 속 터지는 부분이 이런 거였다. 무슨 일이 있으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얼버무리고 무마하려는 이 태도 말이다.   

    

정색을 하며 다시 말을 했다.

어머니! 애비가 친척들 앞에서 동생들 앞에서 망신당한 건 차치하고서라도 지금 아들들 앞에서  수모를 당한 거잖아요. 우리 아들들 뇌리에 박히기 전에 저는 가겠습니다.


했더니 그제서야 “내가 원래 말을 막 해 야. 니가 한두 해 산 것도 아니고.”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나왔다. 굳은 표정으로 나갈 기세를 보였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니가 그렇게 속 상했다면 미안하다”


이러시기에 어머니 손을 가만히 붙잡고 조용히 말을 했다.


어머니 저한테 이러실 게 아니라 애비는 형제들 앞에서 공적으로 무시당한 거잖아요.
그러니 형제들 앞에서 어머님이 제 남편 바로 세워주세요.  

    

아들도 못 보고 손자들도 못 보신다는 말에 충격을 받으신듯 했다. 한참을 생각하는 눈치시더니 알았다 하시면서 부엌으로 가버리셨다.

다음날 형제들이 있는데서 “셋째, 저것이 나는 제일 이물이 없어 야. 그래서 내가 함부로 말을 하는데, 느그들은 절대로 형한테 그러면 안 된다이. 알긌냐”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는 됐는데, 며느리가  종주먹을 쥐고 시에미한테 따졌다고 남편한테 말을 했나 보다.

귀경 길에 운전을 하고 오는데 남편이 화가 났는지 나하고 눈도 안 맞추려들었다. 아이들은 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잠든 것을 확인한 순간, 그제서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니가 뭔데 우리 엄마를 가르치려드냐고 생난리를 부렸다.

    

서울 도착할 때까지 대꾸도 안 하고 말도 섞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아직도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여보, 부모한테도 만만한 자식이 있대요. 나는 내 남편이 부모님께 인정은 받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창피는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만만한 아들이 아니었으면 해. 그것도 아들들 앞에서 당신이 깎이는 일이 없었으면 해요. 부모 자식 간에도 예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어느 정도의 거리는 필요한 것 같아.   

   

했더니 그제서야 우리 엄만 원래 그래. 당신이 이해해. 어머니가 사셔야 얼마나 사시겠어.

사셔야 얼마나 사시겠다던 시어머님의 90 가까이 사시다 가셨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대하라"라고, "다른 사람을 바꾸려고도, 혹은 변화하리라고 기대하지도 말라”라고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말했는데, 시어머님이 바뀌셨다. 많이 바뀌신 게 아니지만 내 남편에게 함부로 말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사람이 금방 대대적으로 바뀌기야 하겠냐만 막말을 하시려다가도 주춤하셨다.


세상엔 공짜가 없듯이 돈독한 관계를 만드는 것도 투쟁을 통해 가능했다. 오히려 그 일이 있은 후에 어머님과의 관계가 더 두터워졌다. 적당한 거리두기로 이전보다 나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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