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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순희 Mar 22. 2021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연년세세』를 읽으면서 계속 맴도는 문장이 바로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였다.     


“사람이 어떻게 지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사누.

나라 상감도 그렇게는 못 살 거다”     


어릴 때부터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많았고, 되고 싶은 것 또한 수두룩했다. 친정 엄마께 매번 조르고 떼를 썼다. 그럴 때마다 했던 말이 “나라 상감도 너처럼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지는 못한다”라고 했다. 실제로 들어주지도 않으면서.

     

황정은 작가의 『연년세세』는 4편의 연작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 딸 한세진과 외조부의 묘를 파헤치는 <파묘>와 가장 역할을 해오고 있는 큰 딸 한영진의 <하고 싶은 말>과 엄마 이순일의 아명 순자의 피란 생활과 고모 집에서의 고통, 친구 순자와 얽힌 이야기를 담은 <무명>, 시나리오 작가 한세진의 북페스티벌 참가를 위한 뉴욕 방문과 이모 윤부경의 아들 노먼과의 재회를 다룬 <다가오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네 편 중 두 번째 작품인 <하고 싶은 말>의 한영진에게 감정이입이 됐다.

장녀 한영진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그림을 포기했다. 아버지 한중언을 대신해 고등학교만 졸업을 한 후에 바로 취업을 했다. 한중언이 건어물 가게를 하다 계주의 도망으로 가계가 몰락을 했기 때문이었다. 노동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가족한테 책임을 다하는 맏이로써의 한영진의 행동을 『아들러의 인간이해』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농촌에서의 장자는 어린 시절부터 언젠가 농장을 물려받게 되리라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만 한다고 느끼면서 자라는 다른 형제들보다 훨씬 좋은 상황에서 성장한다. 다른 대부분의 집들에서도 맏아들이 언젠가 집의 주인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전통이 그리 비중 있게 지켜지지 않는 집안, 즉 일반 시민들의 집이나 무산 계층의 집에서도 장자는 적어도 매우 커다란 힘과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집안의 조력자이자 감독자로 간주된다.

-『아들러의 인간이해』, 193쪽


농촌에서의 장자일 경우에 농장을 유산으로 받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권력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그것이 장녀일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한영진처럼 권리는 저멀리 달아나고 의무만 주러주렁 달게 된다.


그럼에도 "넌 우리 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이야. 그러니 너는 다른 사람과는 달라. 훨씬 더 유능해야돼."라는 자기 암시를 하며 자신의 위치에 특별한 가치를 두게 된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가족공동체를 지켜낼 의무를 갖고 있으며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려고 하기 때문에 보수적인 자세를 갖게 된다고 아들러는 평가한다.

   


큰 딸 한영진은 백화점의 유능한 이불 판매원으로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무뚝뚝한 남편 김원상과 살고 있다. 처가 식구들에게 무심한 김원상을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믿고 있을 만큼 남편에 대한 신뢰가 크다. 김원상은 처가 식구를 발뒤꿈치의 때처럼 여길 만큼 처가 식구를 무시하나 나름 속이 깊은 사람이다. 장인 장모를 1층에 살게 하기 위해 보증금을 대주고, 무릎이 좋지 않은 장모 이순일을 업고 제주 오름에 오를 정도로 속이 깊다.      


의식하지도 과시하지도 않은 채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
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한영진은 김원상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 『연년세세』, 70쪽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는 한영진을 위해 이순일은 아무리 늦게 퇴근해도 먼저 자지 않았다.

남편 한중언이 가장 노릇을 변변하기 하지 못해 딸한테 얹혀 살기에 이순일은 집안의 가장 대하듯 한영진을 대한다.

밤이 아무리 늦어도 차려놓은 밥상을 받아선 꾸벅꾸벅 졸면서 그 밥을 먹었다. 월급을 받으면 그 밥상에 월급봉투를 보란 듯이 내려놓았다. 밥상을 향한 “자부와 경멸환멸과 분노를 견디면서”.  


    

내가 몇 시에 퇴근하든 엄마는 부엌에 불을 켜 두고 나를 기다렸어. 다른 식구들이 다 자고 있어도 엄마는 자지 않았지. 매일 늦게까지 나를 기다렸다가 금방 지은 밥하고 새로 끓인 국으로 밥상을 차려줬어.

그런데 엄마, 한만수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아.   
그 애는 거기 살라고 하면서 내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돌아오지 말라고.
너 살기 좋은 데 있으라고.

나는 늘 그것을 묻고 싶었는데.   

  하고 싶은 걸 다하고 살 수는 없다.

- 『연년세세』, 81쪽   


어머니 이순일은 큰 딸 한영진네의 살림과 육아들 도맡아서 하고 있다.

이순일은 한영진과 김원상의 집에서 그릇을 닦고 빨래를 널고 식사를 준비했다. 한영진, 김원상, 예범, 예빈과 한중언, 이순일 자신까지 여섯 사람의 살림을 돌보고 뒤치다꺼리를 한다. 한영진 부부는 그 대가로 한영진의 아래층에서 기거한다. 한영진은 이순일의 케케묵은 세간살이들을 견뎌내야 했고 그녀의 짜증을 감당해야 했다.      


한영진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순일에게 묻고 싶은 오랜 질문이. 왜 나를 당신의 밥상 앞에 붙들어두었는가.
한영진은 그러나 그걸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 질문을 들은 이순일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순간을 대면할 용기가 없었다. 이순일은 이제 칠십 대였고 일생 아이들을 돌보느라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았다. 아마도 끝까지, 그걸 묻는 순간은 오지 않을 거라고 한영진은 생각했다.

-『연년세세』, 83쪽     


아마 이순일이 죽을 때까지도 한영진은 말을 못 할 것이다. 그런 것을 물으면 엄마 이순일은 울지도 모르고, 한영진 또한 엄마가 우는 걸 보고 싶지 않기에. 여태껏 살아왔던 대로 그냥 살아가겠지. 참는 사람만이, 더 마음이 약한 사람만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이기에 모르긴 몰라도 마음에만 고 살아갈 것이다. 한영진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이 집에서 한영진과 이순일만 빼놓고는 모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산다.

아들 한만수는 한국에서 취업이 어려워 뉴질랜드에 가서 잘 살고 있다. 지방대 영문과 출신으로 면접 단계에서 미끄러질 때의 한만수를 한세진은 기억하고 있다.

면접을 시원찮게 봤는지, 쪼그리고 앉아 늙은 개의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던 한만수의 뒷모습을. 이제 기회의 땅 뉴질랜드에서는 그러지 않으리라. 한만수는 한국에서처럼 낙담에 잠겨 있지도 않고, 돌아올 생각조차도 안 한다.  



차녀 한세진 역시 희곡을 쓰며 시나리로 작가로 잘 살아가고 있다. 비록 변변치 않은 수입일망정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지낸다. 형부 김원상과도 마주치는 것을 싫어하기에 가능하면 대면하는 자리를 애써 피한다.      


너 하고 싶은 걸 다하고 살 수는 없어.
기억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중략-

 거짓말.

 거짓말, 하고 생각할 때마다 어째서 피 맛을 느끼곤 하는지 모를 일이라고 한영진은 생각했다.

 -『연년세세』, 84쪽     


“너 하고 싶은 걸 다하고 살 수는 없어”.

한영진은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연년세세年年歲歲, 해마다 분노에 차서 “거짓말”, “거짓말” 되뇌었을 듯싶다.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빌던 이순일의 바람은 한영진의 희생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듯 보인다. 단 한 사람 한영진의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아니 못함으로써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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