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둘이서 걸어온 길이라면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 없는 것이라오."
길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는 게 일상이 된 지 오래다. 며칠 전 공원에서 꽃잎을 따서 서로 먹여주고 있는 꼬마 친구들을 봤다. 초등학교 1학년이나 됐을까. 무엇을 하나 봤더니 꽃을 따서 빨아먹고 있었다.
"우리 꼬마 친구들이 무엇을 하고 있나요" 했더니
"이거 빨아먹으면 달콤한 꿀이 나온다요"
"한번 먹어볼래요"하면서 내입에 쏙 넣어준다.
남자아이는 내 여자 친구라며 연신 먹이고 있었다. 꼬마 숙녀도 이에 질세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남자 친구 입에 넣어준다.
바깥 풍경뿐만 아니라 전동차 안이나 실내에서도 사람들을 유심히 본다. 전철 안에서 무아지경으로 스마트 폰 보는 사람들, 소설 창작반 예비 작가들의 골똘한 모습들, 천정부지로 오른 부동산 얘기들을 곱씹어 가며, 별다방에서 노년을 뒷걸음치고 있는 주변의 사람들. 급등한 부동산 소식에 누군가는 탄식을 하고, 누군가는 안도하는 모습이다. 참 다양한 사랄들을 관찰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요즘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소설 속의 사람들이다. 특히 2000년 이후 발표된 한국 단편 소설들 속에 나타난 인물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품 속에 나타난 인물들이 하는 '말의 의미'에 대해 집중해 가면서 읽는다.
최근에 읽은 것 중에 눈길이 가는 것은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 실린 <벚꽃 새해>와 오선영의 <<모두의 내력>>에 수록된 <해바라기 벽>이다.
<벚꽃 새해>는 프리랜서 사진 작가인 성진에게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서 느닷없는 문자를 받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사귈 때 준 태그호이어 시계를 돌려달라는 전 여친 정연의 요구에 성진은 황당해한다. 이미 깨진 항아리가 된 마당에 선물로 준 것을 돌려달라는 진상 여자 친구에 성진은 난감하다. 아주 아주 오래전에 중고로 팔아먹어 이미 그의 수중에는 시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계를 찾는 과정에서 황학동의 시계점 정시당으로 간다. 그곳에서 만난 정시당의 주인 영감에게서 삶의 진리와 같은 얘기를 듣는다.
"마지막으로 잔소리를 한마디 하자면, 어쩌다 이런 구석까지 찾아왔대도 그게 둘이서 걸어온 길이라면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 없는 것이라오."
노인의 말에 성진과 정연은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고 확인하게 된다. 두 번 다시 기억하기 싫은 시공간이었을망정 지나간 모든 시간들은 헛된 것은 아니리라.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다 의미가 있으니까.
우리는 다만 한참 지나간 이후에나 그 시간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뿐이다. 지나간 시간이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삶의 희망을 본다.
<벚꽃 새해>를 읽으며, 무엇으로 나의 원년으로 삼을까 두고두고 생각을 하고 있다.
오선영의 <해바라기 벽>은 작가의 벽화마을 체험을 이야기 삼아 쓴 것이다. 등단작인 <해바라기 벽>은 관광객들의 피사체로 전락한 그곳 사람들의 입장에서 문제제기를 한 점이 눈에 뜬다.
몇 년 전부터 좀 더 나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달동네에 벽화마을을 조성하는 것이 붐이었다. 지금도 '재생'이라는 이름으로 낙후된 지역에서는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해바라기 벽>은 벽화마을에 기대어 살아갈 수박에 없는 소녀의 이야기이다. 소설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식적인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또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허위의식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은 할머니와 함께 사는 결손 가정의 17살 소녀다. 해바라기 벽으로 치장한 마을을 구경하기 위해 구경꾼들의 셔터 소리가 요란하다. 공중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밖에는 극성맞은 관람객이 끝까지 따라붙으며 사진을 찍어댄다.
벽화마을 소녀의 탈출구는 하나,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삶을 가짜로 '포장'한 채 가난을 감추기 위해 블로그에 부잣집 딸 행세를 한다. 받지도 않은 17살 생일 선물들을 블로그에 전시한다. 때마침 블로그 이웃의 음악 선물이 도착한다.
몇 달 동안 뜸했던 블로그 이웃은 사진을 올린다. 휴지를 들고 공중화장실로 바삐 가는 벽화마을 소녀의 모습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여학생에게 화장실 만들어 주기> 게시판이 생기고, 곧이어 가짜 블로그를 운영한 것이 들통이나 소녀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온라인에 떠돌던 사진들은 급기야 오프라인으로까지 튀어나와 그녀를 괴롭힌다.
온 동네가 해바라기 물결로 넘쳐났다. 하지만 산꼭대기의 동네가 벽화 마을이 되기를 처음부터 모두가 원한 것은 아니었다.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려던 남학 생에게 소녀의 할머니는 말한다.
"무당 집도 아니고, 정신 사납게 가정집에 무슨 꽃 그림"이냐고 역정을 낸다.
벽에다 무슨 꽃을 그리냐며 완강히 버티는 할머니한테 어느 날 구청 직원이 찾아온다.
"할머니, 나랏일에 반대하면 붙잡혀 가는 거 모르세요?
하면서 으름장을 놓는다.
구청 직원의 화법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공익을 위해 개인의 권리는 침해해도 되는가, 또 다수를 위해 소수의 의견은 무시돼도 괜찮은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간 다수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무시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소녀의 집은 노란 해바라기가 수백 송이 피어난 벽과 담으로 대변신을 했다. 오히려 이러한 탈바꿈으로 인해 할머니와 소녀는 해바라기 감옥에 갇혀버렸다.
"감옥 같은 우리 집과 시든 꽃 같은 할머니, 채 피지 못한 꽃인 내게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소녀의 독백처럼 관람객이나 도시 재생에 관여한 사람들은 해바라기 꽃으로 장식된 겉모습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돕는다고 할 때 정작 그들을 진심으로 얼마나 잘 알고 돕는다고 하는지 의문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돕고 있다고 생색을 내고 있지는 않은지 잠시 생각에 젖었다. 타인의 결핍을 보며 행하는 값싼 눈물이 상대에게 얼마나 상처를 입히는지 한 번 돌아볼 일이다. 자기 삶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 자체가 교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명문대 합격 글쓰기>>의 저자 진순희 인사드립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