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시인의 <뼈에 새긴 그 이름>을 읽으며 신화 속 이야기로 남아버린 지금의 내 모습이 보였다.
그와 헤어지고 나면 늘 노심초사했다. 행여 무슨 일이 생겨 영영 그의 소식을 못 듣게 되면 어쩌지 하는 애끓는 마음이 있었다. 한 순간에 바람처럼 그가 사라져 버릴까 전전긍긍했다. 그냥 걱정이 많았다.
<뼈에 새긴 그 이름>처럼 "화엄경을 보아도/ 잘 모르는 활자들 속에/ 슬쩍/ 그 이름을 끼워서" 읽듯이 모든 일을 그와 연관 지어 생각을 했다. 피부가 하얀 남자만 봐도 그가 보였고, 수줍게 웃는 사람의 얼굴에서도 그를 찾아냈다. 느릿느릿 말하는 목소리만 들어도 그인가 싶어 돌아봤다.
"폭설의 실상사 앞 들녘을 걸으면/ 발자국,/ 발자국들이 모여/ 복숭아뼈에 새긴 그 이름을" 그리듯 바람 소리만 들어도 그가 오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그가 오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신혼 때 퇴근 무렵엔 지하철로 마중 나가면 영락없이 때맞춰서 역에서 올라오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머릿결에서도 수박 냄새가 나던 그였는데, "길이라면 어차피 아니 갈 수 없는 길"이어서 평행으로 가던 길을 마주 잡고 가자며 합쳐버렸는데, 한 사십 년 살고 나니 옛날이 무색하리 만큼 지금은 동지애로 살아가고 있다. 웬만해서는 서로가 불편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안녕'이라는 지혜를 터득한 지 오래다.
내게도 "행여/ 이승의 마지막일지도 몰라/ 그저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기만 해도/ 갈비뼈가 어긋"나듯 애타는 시절이 있었다. 이제 사랑도 세월에 풍화되어 우정으로 아니 동지애적 사랑으로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어 가며 지내고 있는 나날이다. "뼈에 새긴 그 이름"이 그가 맞는지 감감하다. 진화인지 퇴보인지 그 조차 무덤덤하게 아주 잘 지내고 있는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