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자유가 경험하는 현기증"
요즘 내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프로이트의 의자>>를 읽고 난 이후부터다. 아무튼 남이 나를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주변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만나봤던 사람들 중에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을 못 봤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 불안하냐고. 심지어 친한 이웃은 혹시 이것도 일종의 불안 강박으로 인한 우울증 아니냐고 눈을 찡긋하며 웃으며 말하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의자>>에 기대어 불안에 대해 설명해 보려 한다.
'불안'의 어원인 라틴어 단어 'angere'의 의미는 '목을 조르다'란다. 또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은 몸에서 열이 나는 것과 동격으로 보기도 해 불안은 '마음의 열'이라고도 한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자유가 경험하는 현기증'이라는 멋진 표현도 썼다.
존재의 불안과 관련하여서는 빅터 프랭클을 빼놓을 수 없다. 유태인 집단 수용소 시절의 경험을 녹아내어 설명했다. 그는 시련을 반드시 겪을 필요는 없지만 그 삶의 의미를 아는 것이 최악의 환경에서도 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며 로고테라피를 주창했다.
강의 중독 공부 중독 일 중독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열심히 사는 내가 사실은 나도 궁금하다. 어떤 불안이 있기에 나를 이렇게 다그치는 걸까. 아마 불안의 밑바탕에는 경제적인 요인이 클 것이다. 신혼 때처럼 궁핍한 생활로 되돌아갈까 두려워 이렇게 경주마처럼 달리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볼 때가 많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사리 한 결혼. 남들은 신혼의 단꿈에 젖는다고 하지만 그런 달콤한 시절은 길지 않았다. 연애할 때의 다정다감하고 남을 배려하는 남편의 따뜻한 성품이 오히려 문제점으로 불거지는 데는 불과 몇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남이냐고 틈만 나면 몰려다니며 놀던 남편의 친구들도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남이 되어 버렸다.
2월 끝 무렵 시작한 결혼생활이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추석이 다가왔다. 첫 번째로 맞는 추석 명절에는 올케들 보기에도 번듯한 선물이라도 들고 가야 했다. 그런데 친정 가기로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쳐 전화를 하니 곧 수금을 할 거니까 충무로 사무실 근처로 오란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며 수금 좀 해달라며 애원하는 소리가 바깥 계단까지 들려왔다. 명절을 하루 앞두고 수금해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결제를 해줄 것 같았으면 진즉에 해줬지. 답답해하는 눈빛이 느껴졌는지 멋쩍게 쳐다보며 "걱정하지마, 일한 게 있으니 어디에서든 수금이 될 거야" 자신한테 다짐하듯 하는 말에는 이미 맥이 빠져 있었다.
오후 내내 전화하다 결국 친구한테 몇 만 원을 빌려 친정집 앞 과일가게에 들렀다. 자전거 포집 멋쟁이 막내딸 아니냐며 알은 체하는 과일가게 내외 앞에 초라한 기색을 숨겼다. 이것저것 값을 물어보다 우리 가족은 사과를 제일 좋아한다며 그중 갑이 헐한 사과를 골랐다.(참고로 우리 가족은 비싼 배를 좋아했다) 사과한 궤짝을 들고 가는 발걸음이 도착하는 내내 무거웠다. 먹음직하고 보기 좋은 배는 돈이 모자라 못 사고 중간 크기의 사과를 들고 느지막히 들어섰다. 온 가족의 눈길이 사과 궤짝으로 모아졌다.
반대하는 결혼을 호기롭게 하더니 결국 사는 모양새가 그것밖에 안 되냐는 눈빛들이 스쳤다. 남편도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일하다 늦었다며 얼버무렸다. 아무 말도 없이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기만 하는 엄마의 눈길이 싫어 피곤하다며 결혼 전 내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어디 아프냐며 따라 들어왔다. 오빠 내외의 웃고 떠드는 소리들이 소음처럼 들려왔다. 그렇게 아늑했던 내 방도 예전처럼 편하지가 않았다.
불편한 마음을 털어내고 아침 일찍 서둘러 경기도 시숙한테 가야 한다며 집을 나섰다. 수중에 돈 한 푼도 없어 아무 데도 안 가겠다고 버티는 나에게 큰 형한테는 그냥 가도 된다며 남편이 속없이 웃었다. 전곡행 기차를 타고 가는데 차비도 빠듯했다. 기차역에 내려 싸구려 사탕 봉지를 사들고 시아주버님 댁에 들어서니 마당에서 펌프질 하던 큰 동서가 내가 들고 온 시커먼 봉지에 눈길을 멈췄다.
당시만 해도 동네 사람들이 모여 마당에서 전도 부치고 한켠에선 화투도 치면서 시끌벅적하니 명절을 보냈다. 친정을 가도 시댁을 가도 마음이 편치 않은 나와 달리 남편은 형님댁이라 그런지 편안해 보였다.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낚싯대를 둘러메고 강으로 나갔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우두커니 서있다가 적당히 일거리를 찾아 눌러앉았다. 설거지를 바로바로 해치우며 낚시터에 간 남편을 기다렸다. 밤이 되자 여자들과 아이들은 솜방망이에 석유를 묻혀 게 잡으러 강으로 나가자 했다. 도시에서만 살아왔던 탓에 캄캄한 밤에 강으로 나가는 것도 무서워 밤이 빨리 지나기를 기다렸다. 그해의 추석 연휴는 길기만 했다. 사흘 동안 시댁에서의 지루한 일상이 끝나고 서울행 기차를 타며 다음 명절에는 이번처럼 비루하지 않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그다음의 구정 때도 다시 돌아오는 추석 때도 남편은 여전히 수금을 못했다. (왜 이렇게 내 남편은 수금을 못하는지 한스러웠다) 친정에 갈 적마다 돈 때문에 애를 태웠다. 친정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이 모래주머니를 찬 듯 무거웠다.
친정집에 갔을 때다. 어릴 적부터 갈치조림을 좋아했던 터라 상에 올라온 갈치조림에 젓가락이 분주했다. 친정집은 과일도 짝으로 들여놓고 생선도 두툼하고 좋은 것만 먹었다. 두툼한 갈치 등짝을 뼈를 발라가며 맛있게 먹고 있을 때였다. 그동안 너네 집에서는 갈치조림도 못해 먹었냐며 묻는 친정엄마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울고불고 결혼 승낙 안 해주면 죽을 듯이 난리를 치더니 겨우 그렇게 사느냐? 그 꼴란 결혼하더니 갈치도 못 먹고 사는가 보다며 답답해했다. 친정도 어렵게 사는 딸한테는 너그럽지 못했다.
남들 안 보내는 대학까지 보내 놨는데 그렇게 살려고 결혼했냐는 말이 두고두고 가슴에 맺혔다. 공부 잘하는 딸이 자랑스러워 학교도 부지런히 쫒았다니며 가르쳐 놨더니 못 배운 시골의 사촌들 보다 힘들게 산다며 혀를찼다.
친정이고 시댁이고 갈 때마다 마음만 다쳐서 왔다. 시댁은 시댁대로 쟤는 멀쩡하니 대학까지 나와서 남편만 바라보고 있다느니, 남편이 어려우면 여자라도 발 벗고 나서야 하는데 생활력이 없어 큰일이라며 걱정을 했다. 양쪽 집을 가도 편치를 않았다. 내 집에 가만히 들어 앉아 있는 날이 더 속 편했다.
마음 상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부자는 아니어도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돈이 있었으면 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돈은 남편이랑은 친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내 남편에게는 아예 곁을 내주지 않았다. 연두부 같은 남편만 믿고 살다가는 내 자존심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아이들 교육도 힘들 것 같다는 위기의식이 들었다.
고민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잘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어 아이들 키우는 내내 틈만 나면 공부를 했다. 어릴 때부터 꼬마 시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던 기억을 떠올려 도서관에서 하는 독서지도자 과정을 등록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무렵 내 아이를 포함해 팀을 짜서 독서지도를 시작했다. 집 근처의 공원으로 데리고 나가 비눗방울 놀이로 야외 수업을 한 다음 바로 일기를 쓰게 했다. 비디오로 영화를 본 다음 느낀 점을 말해 보게도 하고 역할을 나눠 연기도 해보게 했다. 실제로 경험한 것을 쓰게 하니 가르치는 아이들의 글에는 생동감이 넘쳤고 학교에서 상 받아 오는 아이들도 제법 늘기 시작했다.
수업이 재미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중2 큰 아들 팀도 꾸려졌다. 중학교 내신 시험기간에는 아이들 스스로 읽고 정리하게 했다. 자기들이 공부에 참여해서 그런지 배우는 학생들이 시험도 잘 봐왔다. 시간이 지나게 되자 특목고 국어 수업과 고3 논술 수업까지 확장하게 되었다. 학생들을 유익하게 해주는 것이 나 자신을 복되게 해 줄 거라는 각오로 가르쳤다. 집에서 하는 수업이 많아져 급기야는 사무실을 얻어 나가게 되었다.
일은 내가 노력한 만큼의 경제적인 윤택함과 당당함을 가져다주었다. 돈이 없어 위축되지 않도록 해 주었고 돈 때문에 울지 않는 엄마가 되게 했다. 특히 친정에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게 해 줬다.
지금은 경제적인 여유뿐만 아니라 마음의 여유까지도 생겼다. 그랬어도 명절이 오기 직전의 가을이 오면 왠지 쓸쓸하고 서글프다. 언제든 한없이 초라하고 왜소한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될까 봐 두렵다.
결혼을 기점으로 친정에서의 나의 위치는 불가촉천민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막내다 보니 다른 형제에 비해 사랑을 듬뿍 받았던 딸이었지만 친정 엄마의 기대치를 못미치는 딸은 어디에도 설자리가 없었다.
자전거포를 하는 친정은 버스가 지나가는 길가에 있었다. 막내 딸이 올까 문밖에서 계속 서성거렸다는 친정 엄마의 모습도 아리다. 버스 정류장 쪽으로 내내 눈길을 주고 있다가도 막상 막내 딸이 오면 퉁명스럽게 변하는 시어머님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올케의 말도 가슴 시리다.
9월 추석 명절을 앞두고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중풍으로 오랜 병마에 시달리다 고생만 하시다 이승에서의 작별을 고했다. 오래도록 병석에 계셨어도 자주 찾아뵙지를 못했다. 2년 터울로 낳은 아들 형제 중 큰 아이가 약골이어서 늘 감기를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큰 아이 낳고 바로 풍을 맞은 어머니는 우리 아이 돌 때도 손자를 안아 줄 수가 없었다.
언어 장애와 한쪽의 마비로 안방 아랫목에 누워 있던 친정엄마가 돌아가신 때도 그 가을의 바람이 불던 때였다. 엄마가 위급하단 소식을 듣고 겨우 몇 푼의 돈을 쥐고 친정에 도착하니 나를 기다린 건 눈물을 찍어내는 올케뿐이었다. 막내 아가씨 올까 그쪽으로만 눈길을 주다 끝내 아가씨 오는 것도 못 보고 가셨다고 했다. 눈 감기 전까지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데, 나는 그 알량한 자존심에 걸음을 주춤했다. 친정어머니가 위급하다는 소식에도 빈손으로 친정에 들어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한기를 느끼게 하는 가을바람에도 문밖에서 서성거리며 남편이 수금해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는 다만 얼마라도 쥐고 가려고 남편을 기다리는 내 자존심이 가장 나를 아프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 가슴을 멍들게 한 것은 마지막까지 내가 오기를 기다려준 엄마 없는 그 가을날의 친정의 허전함이었다.
지금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곳에서 살고 있고 학원도 운영하며 성공한 커리어 우먼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하지만 여름이 지나고 추석 명절이 올 무렵의 서늘한 바람만 불면 심란해진다. 텅 빈 바람 부는 들녘의, 석양이 질 무렵이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 발 동동 구르며 눈물 흘리던 어린 신부의 모습이 보인다. 가을 들녘의 그 바람은 내게 상처로 남아 명절 무렵이면 어김없이 마음을 스산하게 만든다.
날씨가 서늘해지며 바람만 불어도 쓸쓸해지면서 불안하다. 그런데 이 불안은 어찌보면 나를 행동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불안은 자유가 경험하는 현기증이라는 말처럼, 불안은 오히려 자아실현이라는 대단한 힘을 발휘하도록 했다. 적어도 나한테는.
자기실현 욕구가 강한 사람은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남의 기대나 의견과 같은 외부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행동하려 합니다. 인생이 문제 해결의 연속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문제가 생기면 회피하기보다는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나와 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편견을 줄이려고 합니다. 세상에 빠져 허덕이기보다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유유히 헤엄쳐 나가려 합니다. 무엇보다 유머를 즐기는 사람이 되려 합니다. -<<프로이트의 의자>> 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