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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복종하게 하는가

오로지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라!

by 진순희

좀 지난 일이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K 작가가 L작가에게 조언 좀 해주라는 연락을 해왔다. 두서너 번 만난 적이 있었던 L작가가 요즘 어렵단다. 그러니 만나서 나처럼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해서 흔쾌히 수락을 했다. 결혼초부터 어려움을 겪어 봤던 터러 남이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 어떻게 하든 힘닿는 대로 도와주려고 했다.


그로부터 L작가에게 연락이 온 것은 2월, 학생들 졸업식날 즈음이었다. 강남에 와 있노라라고 만나자고 하기에 K 작가의 부탁도 있던 터라 시간을 내어 갔다. 일과 관련된 것인 줄 알고 갔는데 웬걸 찻집이 아니라 술을 팔고 있는 밥집이었다. 내게 상담을 원하는 줄 알았더니 이미 세 명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과거에 언론계에 몸담았다고 했던 L작가의 동네 형과 L작가의 여자 동창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분은 내게 무슨 상담을 하겠다는 거지. 사적인 얘기를 하려면 혼자 나와야지 친구들을 데려올 건 무어 람. 잠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생각을 가다듬어 지금은 상담할 상황이 안 되니 가 봐야 되나 하고 있는데 잠시 후에 과거에 유명했던 가수 한 분이 들어왔다. 분주하게 인사가 오고 가더니 그가 운영하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 그 가수를 따라 장소로 옮겼다. 그곳은 술도 팔고 노래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상황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오늘 저하고 상담하려고 했던 거 아니었나요?" 했더니 그러려고는 했단다. 그런데 형도 따라오고 여자 동창도 와서 오늘은 좀 그렇고 다음번에 다시 연락을 하겠노라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발딱 일어섰어야 했는 데 그러질 못했다.


술자리.PNG


놀아본 가락들은 있어서 그런지 일어로 영어로 신이 나서들 나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몇 곡들을 부르고 나서는 그 여자 동창이 말했다.

"밴드한테 돈을 내야 하는데, 돈을." 말만 하고들 있었다. 그 말을 듣고 유심히 보니, 밴드 앞에 작은 통이 있었다. 남자들이 두 명이나 있었어도 아무도 돈 낼 생각을 안 했다. 보다 못해 "저기다 얼마를 내야 하는 건가요" 했더니 L작가 왈, 2만 원만 내면 된단다. 2만 원을 지갑에서 빼니 L작가가 낚아채듯이 밴드한테 갖다 줬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한참을 노래들을 하고 술들을 시켜가며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학원에는 도와드려야 할 분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나온 상태라 불안했다. 다른 선생님한테 맡겨두고 오긴 했지만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거의 아무것도 안 먹다 시피 하고 앉아 있었다. 성화에 못 이겨 노래도 마지못해 한 곡 불렀다. 일터로 들어가 봐야 하는데 하면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찰나에 L작가가 말했다.


"이 술값은 진 선생이 낼 거지?" 네?

세 번이나 만났을까? 내게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언제부터 '선생'으로 내려왔지?

황당함을 감추고 계산대로 가니 카운터를 보던 여성이 남자들이 있는데 왜 여자분이 계산을 하세요 한다.

"저 보고 계산 좀 해달라는데요" 바보처럼 이렇게 말했다. 늙은 가수분은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에 눈을 피했고 카운터의 아가씨도 어쩔줄을 몰라했다.


계산서를 받는 순간 기겁을 했다. 월드 비전의 아프리카 열 다섯 가족을 한 달 살게 할 만한 돈이 나왔다. 몇만 원이면 학교도 보내고 네 식구 한 달 생활할 수 있다는데 그만큼이나 술값이 나왔다. 살면서 이런 곳을 가볼 기회도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 모임 돈으로 정산을 했기에 이번과 같은 경우는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n분의 1만 계산을 하고 나와도 됐다. 그것을 생각 못 해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냥 K 작가 얼굴을 봐서 참고 계산을 하고 나왔다. 밖으로 나와서는 소개한 K 작가에게 "뭐 그런 사람을 나보고 도와주라고 했냐"라고 한바탕 퍼부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애들처럼 몰려다니며 술이나 얻어먹고 다니는 사람을 나보고 도와주라고 했던 거냐고. 너무 불쾌 하다"라고 했더니 K 작가가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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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L작가가 나를 몇 번이나 만났다고, 심지어 그는 내게 도움을 받고자 만나려고 했던 사람이다. 무슨 허점을 보였기에 내게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또 나는 왜 바보 같이 그것을 수용했던 것일까? 문단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서 아니면 K 작가랑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서?


마음이 복잡하기도 했지만 나 자신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속에서 천불이 나서 차를 탈 수가 없었다. 기나긴 추운 밤거리를 걸어오면서 그 부당한 것을 수용한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평소 불의한 것에 조금도 참아내 지를 못하는 내가 그날 그 명령에 무기력하게 복종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밤중에 L작가에게서 카톡이 왔다. 그 상황을 구차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아무 반응도 안 하고 있으니 "서운하셨습니까? 이런 문자가 왔다. '서운'이라고? 상황 파악도 못하는 이런 사람에게 할 수 있는최대한의 복수는 고작 수신 차단하고 스팸으로 돌려놓는 것뿐이었다.


오지랖 떨다 봉변을 당한 나 자신을 다스리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갈수록 그 돈이면 이것도 할 텐테, 저것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미련이 남았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 쓴 것도 아니고 명분 없는 헛돈 쓴 것에 대한 자책감이 들었다. 그런테 그런 부당한 요구에 복종한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 <컴플라이언스>를 보며 알았다.


컴플라이언스.PNG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0956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참 독특했다. 실체는 보이지 않고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로 사건이 시작된다. 패스트푸드 매장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 경찰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매장 매니저 산드라에게 절도 사건을 접수했다며 통고를 한다. 여태껏 아무 문제가 없었던 금발의 소녀 베키를 범인으로 몰아 그녀의 몸을 수색하라고 명령한다. 주저하는 산드라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당장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베키를 유치장에 가둔 상태에서 조사를 하겠노라고.


그는 베키에게도 같은 명령을 한다. 당장 몸수색을 받든 지 유치장에서 조사를 받든 지 선택하라고.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 순간에 맞는 최선의 선택을 한단다. 시간이 흐른 다음에 생각해 보면 그것이 진정 어리석은 일이었을망정 그 상황에서는 그 선택이 최선의 것이란다.


감옥에 가느니 몸수색이 낫겠다는 판단 아래 이 둘은 경찰관의 명령에 따른다. 그가 명령하는 대로 베키는 옷을 벗게 되지만 돈을 훔쳤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수사는 점점 강도가 높아진다. 증거가 나오지 않자 남자로 바꾸라고 한다. 급기야는 매니저 산드라의 약혼자까지 불러들여 가리고 있던 베키의 앞치마를 벗게 한다. 나체 상태인 베키는 산드라의 약혼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된다. 매장 안은 손님들로 떠들썩하고 직원들은 바빴다. 매장 안에 달린 작은 창고 안에서 '보이스강간'사건이 소리 없이 일어났다.



전화.PNG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0956


어쩔 수 없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복종했던 나 자신과 겹쳐져서 영화를 보는 내내 분통이 치밀었다. 진짜 경찰인지 아닌 지 확인도 안 하고 전화기 너머의 경찰관을 사칭한 남자의 명령에 순순히 복종할 수가 있는지. 경찰관의 지시대로 산드라와 약혼자는 어떻게 10대인 베케에게 성적인 폭력을 가할 수 있는지.

적어도 피해 당사자인 베키만은 끝가지 물고 늘어져 부당한 폭력에 대응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어린 소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짜 경찰이라고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뒤에 산드라는 자신도 피해자라고 항변한다. 경찰관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자기 합리화는 물론이고 책임까지 회피했다. 베키 또한 의구심이 전혀 들지 않았냐? 왜 의심하지 않고 가짜 경찰관의 명령에 순순히 따랐냐고 하니까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걸 직감했다고 했다.


권위에 대한 복종은 권위자에 대한 심리적 압박으로 인해 생긴다. 그 결과 권위자가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


권력과 관련하여 잘 설명한 사람이 베버다. 그는 출처에 따라 카리스마적 권위, 관습적 권위, 합법적 권위 등으로 구분하였다. 카리스마적 권위는 영웅적 개인에 대한 믿음을 말하고는 것이고, 관습적 권위는 전통적 권위들에 대한 믿음을 지칭한다. 특히 합법적 권력은 법과 같은 종류의 믿음을 바탕으로 하기에 순종을 요구할 수 있다.


누가 우리를 복종하게 하는가. 상대가 키리스마가 넘쳐서, 아니면 전통적인 권위를 신봉해서 또는 <컴플라이언스>에 나타난 것처럼 합법적인 권위에 압도되어서.

모르긴 몰라도 산드라나 베키가 순순이 복종했던 것은 경찰관이라는 합법적인 권력에 위압감을 느껴서이지 않았을까? 그러면 나는? 부당한 요구에 어처구니없이 순응했던 것은 무엇일까? 뒷일을 생각하는 체면이라는 자기 합리화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자시 자신에게 명령하는 사람이 돼라!
만약 지금처럼 가만히 있다면 평생 남의 명령을 듣고 살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다.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라!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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