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는 우리 엄마
다목적 엄마
까만색 숄더백이 있다, 아이에게 몇 년 전 노트북을 넣고 다니라고 사줬던 것이다. 검은색이라 때도 잘 타지 않고 캔버스 천이라 무겁지도 않고 크기도 적당해서 특별하지도 않은 그 가방을 아이는 지금도 봄 여름 가을 겨울, 학교 데이트 엠티 할 것 없이 메고 다닌다.
큰 아이가 방금 또 그 "다목적 가방"을 들고 강원도에 간다며 나갔다. 일박이일의 짧은 여행인데 장마철이라 운전 조심하라고 단속을 했다.
아이를 보내고 새소리를 들으려고 문을 열어 뒀더니 아랫집에서 미역국을 끓이는가 보다. 짭조름한 미역과 간장 냄새가 올라온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을 열나흘을 먹었다. 엄마는 예민해서 잠을 안 자고 보채는 첫 손주를 안아 재우고 엄마에게 첫 아이인 내게 끼니마다 맛과 재료가 다른 미역국을 해주었다. 1998년 12월 말이니 엄마가 딱 오십이 되던 해였다. 지금 생각하니 아이 생일이 28일이고 엄마 생일이 31일이니 산부인과에서 퇴원하고 집에 돌아온 날이 엄마 생일날이 아니었나 싶다. 아마도 스스로의 생일 미역국이기도 한 그것을 엄마는 커다란 솥에 한가득 끓였다. 옆에선 기저귀나 젖병이 삶아지고. 산후조리의 기억, 내게는 부엌과 거실이 구분되지 않던 스무 평짜리 아파트에서 내내 끓고 있던 미역국 냄새와 늘 물방울이 맺혀 있던 엄마의 손등으로 환기된다. 시어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손주가 보고 싶다고 드나드시고 엄마는 어른들의 식사까지 챙기느라 눈에 실핏줄이 터지고 다리가 퉁퉁 부었다. 그때는 몰랐고 지금 떠올려 보는 것들이다.
"니네 엄마"라고 어머님이 부르던 우리 엄마는 틈만 나면 이후로도 시어른들 "몰래" 나를 도와주려 드나드셨다. 어머님이 네가 니네엄마가 편할 테니까 라는 말로 엄마의 돌봄을 당연히 여기면서도 엄마가 자주 오는 걸 티가 나게 싫어하셔서였다. 그럼에도 편안한 엄마와는 노동과 돌봄을 공유하기만 하고 여행이랄지 소풍과 같이 즐거운 일은 늘 시어른들과 함께였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엄마와 일본 여행을 다녀왔었다. 엄마와의 여행은 나도 엄마도 익숙한 것이 아니여서 엄마는 집에 남은 사위에게 미안해하느라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나는 나대로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엄마의 감정을 따라가느라 눈치를 보았다. 나는 엄마가 좋아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여행을 가서 알았다.
아이의 검정 가방은 이번엔 여행도 따라갔다. 속옷과 선크림과 티셔츠를 넣고서. 비가 또 쏟아진다.
엄마한테 전화해야겠다. 미역국 끓여 먹자고. 장마 지나면 우리도 어디 같이 놀러 가자고. 엄마가 좋아하는 물회도 꽃게도 장어도 먹고 바다에 발도 담그고 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