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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냐 Jan 12. 2023

선의의 허영이라도

어른이라는 말 - 어른 김장하

"슬픔은 이길 수 없어요. 슬픔을 어떻게 이겨요? 눈물 흘리며 이길 수 있어요? 그건 극복이 아니죠. 극복이란 말은 강요의 성격을 띠니까요. 그건 슬픔에 잠긴 사람을 더 힘들게 하는 거예요.”


박완서 선생의 말에 공감한다. 슬픔은 슬픔으로서 품고 있는 거다.  떠내려가면 떠내려가는 데로 고이면 고이는 대로.

운다고 슬픔은 작아지지 않는다. 눈물 속에 슬픔은 녹아내리지만 눈물이 마르지 않듯 슬픔은 또 태어난다. 슬픔을 이겨내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폭력이다. 슬픔의 크기를 어찌 재어 볼 수 있을까마는 내가 아는 가장 큰 슬픔은 부모의 눈물이다.  침몰하는 배에 아이를 태운 부모, 죽을지도 모르는 작업장에 자식을 보낸 부모, 아무도 왜 죽었는지 알려주지 않아서 왜 아직도 달라지지 않는지 알지 못하는 부모.

"다녀오겠습니다"

누군가의 집 앞 계단에서 자꾸만 오작동을 일으키던 기계 속에 끼어서 혼자서는 무리였던 노동 속에서 생명을 잃은 사람들. 다녀올 수 없던 사람들의 슬픔은 어떤가. 그 육체가 사라졌다고 슬픔도 그러한가. 슬픔은 극복될 수 있는가.

날이 풀렸다는 이야기를 이불속에서 들으며 이불 속도 이렇게 춥다고 생각하며 슬픔으로 만들어진 그 육체들을 생각한다. 다섯 명이 일하는 작업장에도 사람이 있다. 캄캄한 새벽에도 짐을 들고 오르내리느라 사람은 깨어 있다. 그저 멍하니 두면 언젠가 다시 어느 부모의 슬픔으로 만들어질 사람. 슬픔은 이겨낼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나아지기는커녕 삼십 년쯤 뒤로 아니 지옥의 밑바닥까지 가속도를 붙여가며 추락해 슬픔의 대공장이 되어 버린 지금.

“겁나는 데 없이 설쳐서” “몰락하고 있는 사회”에 살게 된 오늘이 두렵다.

며칠 전 친구들과 다큐 ”어른 김장하“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 ‘우리끼리’ 돌려보면 뭐 하냐”고 씁쓸히 웃고 말 있는데 오늘아침, 의료보험을 왜 전 국민이 필수로 누려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어느 학교의 대숲글을 마주하고 보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쩌다 이토록 저급한 길로 던져지고 있는 중일까.

김장하는 도움을 받고도 특별한 사람이 되지 못해 부끄럽다는 제자에게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한다 “ 고 담담히 격려한다. “줬으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권력이 무서워하는 것 하나“ 를 만들기 위해 분투한다.

어른이라는 말은 이미 죽은 말이 되고 만 것 같다.

차별이나 인권, 생명, 평등이라는 말을 이야기하면 배부른 꼰대들의 ‘선의의 허영’이라고 비난받을 것이 두렵다.


길에서 공장에서 계단에서 쓰러져 간 사람들을 또 어느 부모의 극복할 수 없는 슬픔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이 사회를 어떡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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