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연습

by naniverse

나는 개똥벌레, 친구가 없네.

혼자 놀다 지치면 조용히 읊조리던 나의 주제가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다는 느낌이 들던 때, 파이어족들이 모여있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를 기웃거려도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경제적 독립을 이뤄 이른 은퇴를 꿈꾸는, 또는 이미 은퇴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니! 어쩌면 이곳에 머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예감이 맞다면, 이곳에 눌러앉아 볼까? 하고 생각했다.


용기를 내 나간 오프라인 모임에서 느꼈다. 이곳은 뭔가 다르다. 파이어 4년 차 백수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아무도 나에게 왜 일을 안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이상한 반응이었다. 오히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백수가 됐느냐고 노하우를 말해 보라고 보챈다. 친구들이나 지인들처럼 언제까지 놀 거야? 왜 일할 생각이 없어? 하고 묻지 않는 그들이 어색하지만 반가웠다.

나이도 성별도 모두 제각각인 사람들이었지만, 같은 목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우리는 종종 모여 세상 사는 이야기를 했다. 회사에 관한 이야기 대신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쓸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임신, 출산, 육아에 관한 이야기 대신 다가올 봄에는 어디를 여행할지 생각을 나눴다.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몇 시간이고 낄낄댔다. 굳이 숨겨야 하는 이야기에 대해 서로 묻지 않았고 관심 두지 않았다. 저 어제 회사 그만뒀습니다, 라는 말에, ‘나이도 어린데 더 일해야지’ 대신 진심으로 손뼉을 쳤다.

생각보다 더 이상한 곳이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서로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서로의 모습을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 어쩌면 내가 그들의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사실에 다음 모임을 자꾸 기다리게 됐다.

운영진들이 바쁜지, 한참 기다려도 어쩐지 오프라인 모임 공지가 뜸해지던 어느 날이었다. 먼저 누구에게 연락하는 일이 거의 없는 나지만, 어쩐지 동지들과 수다가 떨고 싶어지는 날이었다. 벙개를 내가 쳐볼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지만,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그래도 그날은, 누군가와 마주 앉아 웃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글을 써 버렸다.


안녕하세요. 나니입니다 : )

온라인으로 수다 떠는 것으로는 뭐랄까…충전력이 모자라~

그래서 쳐보는 수다벙!

벙개 처음 쳐봐서 너무 떨려요. 엉엉

- 일시 : 9월 3일(수) 오전 10시 ~ 늦어도 1시에 헤어질게요~

- 장소 : 서울 동대입구(3호선) 역 인근 베이커리 카페

- 모집인원 : 나니 포함 3인 이상 시 진행, 최대 6인 마감

- 주제 : 파이어 생활을 준비하며, 파이어 생활하며 드는 생각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들

- 참고 사항

* 저는 MBTI - I입니다. 근데 처음 만나면 E처럼 보인대요. 왜죠?

하지만 전 I니까 최대 3시간만 만나고 헤어질 거예요. 점심 안 먹고 쿨하게 헤어집니다.

* 열린 마음으로 수다 떠실 분 모두 환영합니다. 에라 모르겠다. 우리 만나요. : )


처음 제안해 본 벙개는 절찬리에 마감됐다. 혹시라도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이 나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다. 역시나 처음 보는 사람들과 자기소개를 하고, 온갖 쓸데없는 이야기들로 몇 시간의 수다를 떠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나니 님, 벙개 쳐줘서 정말 고마워요! 자주 만나요! 하는 동지들의 응원에, 다음 벙개는 언제 또 쳐볼까 하는 마음이 슬며시 올라와 버렸다.


“딸, 언제 갈 거야? 주말 다 보내고 갈 거야?”

엄마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엄마, 나 백수 모임 있어서 내일 올라가야 해.”

“그 백수 모임은 근데 누가 주선하는 거야? 주선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

“엄마, 그게 나야. 엄마 딸 큭.”


물론 그곳에서도 마냥 마음에 꼭 맞는 사람들만 만났던 건 아니다. 시종일관 부정적인 태도로 모임에 임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어려웠다. 어떤 이는 내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피해 왔던 ‘아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도 있었다. 왜 결혼 안 해요? 나이도 있는데 빨리 아이를 낳아야죠, 하는 무례한 질문에 잠시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했다.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 나가기 위해, 어디까지 솔직해야 하고,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매번 헷갈리고 어렵다. 나의 모든 속내를 꺼내 보이는 것도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잠시 어려운 시간을 견디면, 그래도 외로운 개똥벌레에게도 잠시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대부분의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서로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만났다. 친구들에게, 또는 가족들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도 나눴다. 한 번 만나고 말 수 있는 관계여서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 내 모습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다음 모임은 싱글레이디 벙이다! 기혼자, 남자들 다 제쳐두고 우리끼리 한 번 만날까요? 하고 가볍게 던진 나의 제안에, 그녀들이 덥석 먹이를 물었다. 저요, 저요! 하는 귀여운 그녀들의 댓글에 대어들을 낚았구나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났다. 우리는 이번에 만나서 또 무슨 이야기하게 될까? 꽃 피는 봄이 오면 가까운 어디라도 나들이를 떠나보는 것은 어떠냐 한 번 물어볼까? 하는 마음에 빨리 그녀들을 만날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다시 연결되는 일은 여전히 어렵지만, 이제는 그 어려움마저도 내가 선택한 삶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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