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루치아노

by naniverse

여행은 오랫동안 ‘도망’이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똑같은 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일종의 여백. 회사에서 정해 준 여름휴가는 매년 8월 첫째 주였다. 어딜 가도 가장 비싼 시기였지만, 어떠한 눈치도 보지 않고 여름휴가를 갈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기도 했다. 휴가 때마다 나는 집을 떠나 어디론가 향했다. 몇 년에 한 번씩은 해외에 갔다. 해외에 갈 만큼 돈이 모이지 않을 때는 주로 제주도에 갔다. 여느 관광객과 마찬가지로, 짧은 일주일의 휴가 동안 메뚜기처럼 장소를 옮겨가며 관광지를 찍고 찍는 전형적인 여행을 했다. 기왕 돈을 들여 멀리까지 왔으니, 딱 일주일 동안 최대한 많은 곳을 돌아보는 것. 단지 그뿐이었다.


치료가 모두 끝나고 일 년쯤 지나니 매일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가는 백수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엄마, 나 해외 한 번 다녀올까? 하고 가볍게 물었지만, 엄마는 가서 아프면 어떡해. 조금 더 있다가 가, 하고 나를 말렸다. 마지막으로 떠났던 유럽 여행이 어느새 5년도 넘어가고 있어 유럽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간절해지고 있었다. 정말 괜찮겠어? 라며 모두 걱정했지만, 나는 3주간의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길어봐야 일주일이었던 과거의 여행과는 다르게 바쁠 일이 없었다. 몇 번의 투어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혼자 천천히 움직였다. 반드시 봐야 할 곳이 꼭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내 발길이 닿는 대로, 내 마음이 향하는 대로 조용히 걷는 여행을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봐준 한 사람을 만난 것은 이곳 이탈리아에서였다.

피렌체에서 100년이 훌쩍 넘은 스테이크 레스토랑에 혼자 방문한 날이었다. 피렌체는 스테이크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레스토랑들에서는 스테이크 1인분을 파는 곳을 찾기 어려웠다. 한국인의 리뷰가 거의 없는 곳에서 1인용 스테이크를 판다는 곳을 발견해 한국에서부터 예약해 두었다. 세월이 보이는 소박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지하로 향하는 긴 계단이 보였다. 계단의 끝에는 나이가 70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 사장님이 날 맞이해줬다.

“어서 오세요. 아마, 미스 나니?”

오픈 시간에 맞춰 한 명 자리를 예약한 사람은 나뿐이었는지, 그는 단번에 나를 알아봤다.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이 있는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동양인들을 구석으로 몰아넣는 식당들도 있다던데 이곳도 혹시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들이고 했지만 상관없었다. 100년이 넘었다더니, 레스토랑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보였다. 천정은 둥근 반원처럼 생겼는데, 천장 빼곡히 오래된 영화 포스터들이 붙여져 있었다.

샐러드 하나와 1인용 스테이크, 그리고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할아버지 사장님은 안타깝게도 와인은 잔으로 팔지 않는다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암 치료의 시작과 함께 그 좋아하던 술은 끊은 지 오래였다. 와인을 마시지 않아도 크게 상관이 없었던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웃었다. 불만 없이 웃어 보이는 내가 마음에 드셨던 걸까? 본식이 나오기 전에 할아버지 사장님은 내가 주문하지도 않은 정체 모를 요리를 들고 와서는 맛을 보라고 놓아주셨다.

“피렌체 전통음식인 리볼리타에요. 채소와 콩, 빵 등을 넣고 끓인 수프죠. 오늘 비가 와서 추웠을 텐데, 몸이 따뜻해질 거예요. 식사가 나오기 전에 한 번 맛을 봐요”

안 그래도 우피치 미술관에서 나와 호텔로 오는 길에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하지 못하고 잔뜩 맞아 몸이 으슬으슬하던 차였다. 시키지도 않은 따뜻한 수프가 너무 맛있어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지만, 머릿속은 잠깐 복잡해졌다. 이게 서비스인지 직접적으로 물어보기에는 나의 영어 실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생각에 나는 주린 배를 채우는 것에 더 열중했다. 기다리던 스테이크를 테이블에 놓아주며 할아버지 사장님은 와인 반병을 내게 건넸다.

“이건 내가 마시는 와인인데, 스테이크와 함께 마셔봐요.”

“네? 저 와인 안 시켰는데요? 아까 한 잔은 안 파신다고. 이걸 왜 내게 주는 거죠?”

“스테이크와 함께 먹으면 맛있어요. 와인 마시고 싶다고 했잖아요. 우리 식당에서 와인 한 잔은 팔지 않으니까, 내가 그냥 내가 마시던 것을 나눠주는 거예요.”

서비스일지, 엑스트라 차지일지 모르지만, 일단 내 손안에 와인 반병이 들어왔다. 낭만의 도시 피렌체에서 암 환자가 마시는 와인 한 잔이라면 하나님도 용서해 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나는 2년 만에 와인 한 모금을 조심스레 마셔버렸다. 스테이크와 철떡 궁합이다. 이 좋은 조합을 2년이나 느끼지 못하고 살았더니 어쩐지 억울해지는 마음이었다. 와인과 함께 음식을 즐기는 내내 할아버지 사장님은 맛은 괜찮은지 부족한 것은 없는지 나를 살뜰하게 챙겼다. 나는 혼자였지만, 내내 나를 보살피며 말을 걸어주는 그 덕분인지, 향기로운 와인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더없이 즐거운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식사를 모두 마치자, 내 테이블에는 주문한 적 없는 초콜릿케이크와 달콤한 디저트 와인이 또 놓였다. 이건 또 뭐냐고 묻는 내게 그가 말했다.

“우리 가게에서 직접 만든 케이크와 와인이예요. 이 와인은 내가 말린 자두를 이용해서 만들었어요. 한 번 마셔봐요.”

점점 미궁에 빠지고 있는 그의 친절에 식사비가 도대체 얼마나 나올 것인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거 최소 20만 원 이상이 나오겠는데 어쩌냐고 하는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이내 뭐 어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 되니 놀람보다, 그저 이 순간을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괜찮아, 오늘의 만찬이 이탈리아를 포함해 내 생애 해외에서 먹은 모든 식사 중 최고였으니까, 라고 생각했다. 사장님이 주신 와인 반병에 이미 취해버렸기 때문일지도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술 때문인지 그의 친절에 그저 기분이 좋아서인지 모르지만, 오랜만에 가슴 깊이 느껴지는 이 행복감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계산을 요청하려 할아버지 사장님을 찾는데, 영 보이지 않았다. 옆 테이블을 담당하는 서버에게 계산을 요청했다. 한참 만에 돌아온 서버는 내게 말했다.

“루치아노 사장님께서 당신의 저녁 식사를 계산하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사장님께서 자리로 오실 거예요.”

잘못하는 영어지만, 그가 내 식삿값을 계산해 준다는 것은 정확하게 이해되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람?

잠시 기다리자 곧 내 테이블로 온 할아버지 사장님이 말했다.

“미스 나니, 당신의 저녁 식사를 오늘 제가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놀란 눈으로 왜냐고 묻는 내게 그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의 레스토랑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즐겨 주는 당신의 모습에 깊이 감명받았어요. 당신처럼 사랑스럽고 열정이 넘치는 손님을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에요. 당신과 저녁 내내 한 대화가 정말 즐거웠어요. 그러니 당신의 저녁 식사를 오늘 내가 대접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놀란 나는 그의 제안을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강경한 그의 태도에 어쩔 도리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꼭 다시 피렌체에 오라고 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꼭 다시 방문하겠노라고, 그땐 엄마, 아빠와 꼭 함께 와서 당신을 만나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조금만 더 영어를 잘했다면, 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전할 수 있었을 텐데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의 나는, 그저 “Thank you so much”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벅찬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베개가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몇 시간을 울었다. 왜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는지, 나조차도 잘 알 수 없었다. 그 친절이 고마워서였는지, 암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온 내가 대견해서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날 밤, 잊고 지냈던 것을 다시 알게 됐다. 나는 누군가에게 기꺼이 호의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여전히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날 이후, 여행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분명히 달라졌다. 더 이상 얼마나 많은 곳을 봤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풍경보다 내 마음의 방향을 먼저 보기 시작했다. 다음 여행에서는 나는 또 어떤 나를 발견하게 될까? 부모님의 어떤 모습을 새롭게 만나게 될까? 사랑하는 나의 연인은 내게 또 어떤 얼굴을 내게 보여줄까? 여행을 바라보는 태도와 시선이 바뀌자, 여행은 더 즐거워졌다. 여행은 더 이상 새로운 장소를 보는 일이 아니었다.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스테이크와 함께 와인을 마시는 날이면 루치아노가 생각났다. 3년 만에 다시 이탈리아로 떠나기로 했다. 루치아노 할아버지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부모님과 함께이다. 이탈리아 여행이 확정되자 아빠가 말했다.

“우리 이번에 이탈리아 가면 우리 딸내미한테 저녁 식사를 대접해 주었다는 그 레스토랑에도 가는 거지? 어떤 선물을 사 갈까?”

그가 아직도 그 레스토랑은 운영하는지, 나를 다시 만난다 해도 나를 기억하기나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를 만나기 위해 다시 이탈리아로 떠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내 가슴은 떨리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었지만, 다시 그곳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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