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설명할 말이 없어서

by naniverse

“나니 님은 아직 싱글이시라면서요? 아침마다 필라테스 오시는 것 보니 재택근무 하시나 봐요?”

며칠 전 필라테스 센터 원장님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나니 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는 회원들이 있더라고요. 난 대답 못 해준다고, 나니 님께 직접 물어보라고 했어요. 아오. 입이 근질근질해서 죽을 뻔했네.”

원장님에게 나의 정체에 관해 물었다던 회원이 그녀였나보다. 일주일에 2~3번씩 몇 달씩 함께 운동해 온 사이였지만, 난 그녀들의 대화에 끼어본 적이 없다. 그녀들의 대화는 늘 아이들과 남편에 관한 이야기였으니, 내가 끼어들 만한 자리가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드디어 오늘 그녀들과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고, 그중 한 명의 질문이 시작됐다.

“재택근무 비슷해요.”

“재택근무 아니시면 프리랜서신가 보다!”

“아… 프리랜서… 맞아요. 비슷해요.”

“프리랜서도 아니에요? 그럼, 잠시 일을 쉬고 계세요?”

“아, 전 투자자예요.”

“투자자요? 나니 님 전업투자자에요? 그럼, 파이어족이에요? 악! 나니 님 내리지 마요! 나 궁금한 것 너무 많단 말이에요. 아 진짜! 나니 님 금요일도 수업 와요? 우리 다음 시간에 더 얘기해요! 꼭 이요!”

그녀들을 피해 엘리베이터에서 후다닥 내리며 생각했다.

‘이 질문이 불편해서 내가 그녀들과 말을 섞지 않으려고 했던 걸까?’

드디어 올 것이 왔고, 나는 대답을 생각해 내야 했다.


평일 낮 대부분의 활동을 하는 백수의 일상을 즐기다 보니, 종종 나를 향하는 묘한 시선을 느끼게 된다. 결혼도 안 했다는데 회사도 안 가고 낮에 취미생활을 하는 40대 젊은 처자, 도대체 정체가 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는 전업주부예요. 24개월 된 아기가 있어요.”

“저는 오후에 스타벅스로 출근해요. 바리스타예요. 그래서 오전에 운동할 수 있어요.”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정 혹은 회사에 소속되어 있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프리랜서는 본인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나서는 재촉하는 눈이 내게 말했다.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이에요?”

오롯이 자유의 몸이 됐다는 기쁨도 잠시, 생각보다 많은 순간에 나를 소개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했다. 집을 사볼까 싶어 들렀던 은행에서도 직업이 무어냐고 물었다. 전세 계약하러 간 부동산에서조차 뭐 하시는 분이세요? 하고 물었다. 회사 다녀요, 라는 짧은 한마디면 충분했는데, 이젠 아니었다. 어느 회사요? 라는, 어쩌다 뒤따라오는 추가 질문에는 oo회사요, 라고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누구나 다니고 싶어 하는 대기업의 일원이라는 것은 어쩐지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소속이 곧 나 자신이었던 신분제에서 탈피한 나는 나를 소개할 적정한 단어를 찾지 못해 오래 헤맸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자리는 늘 긴장됐다. 오늘은 또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그런 자리가 불편하고 두려워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시간은 점차 늘어가기도 했다. 어쩌다 용기를 내 나간 자리에서 그럼, 일은 안 하세요? 라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럼 그냥 놀아요? 라며 진짜 궁금해하며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사는 삶도 있어요. 라고 설명하는 것은 더군다나 어려웠다.

다양한 취미 생활들로 생각보다 빠르게 소진되어 가는 통장 잔액을 보며, 남은 인생을 어떤 사람으로 소개하며 살아야만 하는지 드디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나는 내 돈을 지키기 위해 투자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나를 발견했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까지 고작 예금, 적금밖에 몰랐던 나에게 큰 돈이 주어졌다. 엄마는 내가 아팠던 것이 모두 회사 때문이라고 했고, 그 돈이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 돈은 어쩐지 나의 목숨값인 것 같이 느껴진다고도 했다. 하지만 싫든 좋든 그 돈은 나의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투자자 말고는 나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찾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여전히 망설여졌다. 어느 자리에서 난 ‘투자자’라는 나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전업투자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단타나 치고 있는, 방구석 폐인을 떠올리지는 않을지 걱정됐다. 내가 사는 삶과 조금도 닮아있지 않은 세상의 편견에 나조차도 물들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엄마도 딸을 주식 투자자로 소개하기보다는, 여전히 잘나가는 대기업 직장인으로 소개하고 싶어 했다. 어쩐지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나를 설명할 다른 무엇인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를 설명해 줄 첫 번째 단어는 ‘투자자’ 이외 다른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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