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알면 안 되는 이야기

by naniverse

유방암 수술 전 회진을 기다리던 이른 아침, 안내 문자가 도착했다. 문자를 확인하던 바로 그 순간,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지금 어디야? 신 교수님 회진한다는 이상한 문자가 방금 왔는데 이거 뭐야?”

“아침부터 무슨 소리야?? 나 집인데? 아직 7시도 안 됐잖아. 백수가 당연히 잘 시간인데 왜 깨워. 무슨 문자가 왔는데?”

오빠도 잠시 전 내가 받은 문자를 똑같이 받은 모양이었다. 내가 가장 걱정하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사실만큼은 들키면 안 되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오류가 났나 보지, 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오빠와의 통화를 서둘러 마무리했다. 양쪽 가슴을 모두 수술해야 해서 이미 다리에 수액 바늘을 꽂아 놓은 상태라 마음은 급했지만, 뛸 수도 없었다. 빠른 걸음으로 뒤뚱거리며 뛰다시피 간호사실로 가서 외쳤다.

“선생님, 제가 가족에게 비밀로 하고 수술하러 온 거라 어떠한 안내도 가족에게 나가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오늘 보호자로 되어 있는 오빠에게 연락이 갔대요! 지금 당장 이것 좀 안 가게 해주세요! 급해요! 가족들이 알면 절대 안 되는데요!!!”


유방암 진단을 받고 가장 심각하게 고민한 것은 수술도 아니고 추가 치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었다. ‘가족들에게 두 번째 암에 관해 이야기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한다면 어디까지 할 것인가?’

자궁경부암 치료 과정에서 무엇보다 내 마음을 힘들게 했던 것은 사실 가족에게 괜찮은 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엄마는 고작 3개월의 내 첫 번째 암 치료 기간 나보다 더 눈에 띄게 말라 갔다. 나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한 엄마였다. 누구보다 강해지겠다고 약속했지만, 엄마의 얼굴과 몸짓은 언제나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엄마가 이 슬픔에 스스로 무너지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기 위해 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씩씩하고 웃는 딸이기를 자처하기로 결심했다. 한 걸음 떼는 것조차 고통스러웠지만, 수술 이틀째부터 엄마에게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 걷기 위해 애썼다. 고통마저 숨기려, 괜찮은 척 더 밝게 웃었다. 아빠는 그 어느 때보다 기도를 열심히 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성당을 다니는 것이 아니냐고 놀림을 받던 아빠였지만, 아빠는 나의 회복을 위해 성경을 쓰고 또 썼다. 환자보다 더 환자 같은 엄마 곁을 굳건히 지키는 것도 아빠였다. 오빠는 매일매일 나의 컨디션과 치료 경과를 체크했다. 시도 때도 없이 오는 전화와 문자 속에서, 나는 점점 숨이 막혀왔다. 어쩌다 가끔 연락하던 적당한 거리의 남매였던 오빠와 나 사이는 지나치게 가까워져 버렸다.


모두에게 처음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알지 못했다. 암 환자에게 쏟아지는 지나친 관심은 암 환자를 종종 지치게 한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지나치게 독립적이라는 평가를 종종 받곤 하는 나는, 모든 가족의 시선이 나의 건강, 치료에 몰리는 것을 편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 하나 챙기기도 버거웠던 그때, 나는 부모님 집에서 지내기로 예정했던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2주 만에 내 집으로 돌아왔다.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우리는 알지 못했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편히 숨을 쉴 수 있었다.

두 번째 암 확진이 내려진 것은 첫 번째 암 치료를 끝내고 겨우 열흘쯤 지난 날이었다. 이제 치료가 다 끝났다고,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고 가족들이 모여 함께 웃은 지 고작 열흘이 지났을 때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이제 겨우 활짝 웃는 엄마에게 난 두 번째 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휴가를 써가며 내 병원 길에 여러 번 동행했던 오빠였다. 그가 이제 본인의 가족과 함께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때, 나는 도저히 새로운 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가족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내게 남자 친구가 묻고 또 물었다.

“자기야, 정말 말하지 않아도 괜찮겠어? 엄마가 걱정하실 테지만 그래도 엄마가 자기를 보살펴 주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자기가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긴 하는데,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잖아.”

“자기가 내 옆에 있어 줄 거잖아. 자기만 있으면 괜찮아. 유방암 수술은 부분절제라 별로 안 힘들대. 퇴원도 금방 하고. 암이 2개라고 하면 엄마가 이번엔 못 버틸 것 같아.”

어찌나 운이 나쁜지, 하나도 아닌 두 개의 암이라니. 엄마는 알면, 내 앞에서 울지 않겠다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갉아먹을 게 뻔했다. 그렇게 무너져 내릴 엄마를 볼 자신이 내게는 없었다. 다행히 남자 친구는 자신이 옆에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다독였고, 그만 내 곁에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가족들에게는, 특히 엄마에게 나의 두 번째 암에 대해 죽을 때까지 알리지 않기로 결심하고야 말았다.

유방암은 두 번의 수술, 열아홉 번의 방사선 치료로 마무리됐다. 양쪽 가슴은 서로 성질이 다른 암이었다. 0기라고 했던 오른쪽 가슴에 수술 후 미세침윤이 발견되면서 결국 난 유방암 1기 암 환자가 됐다. 또다시 차가운 수술실에 들어갔다. 가슴을 다 드러내고 잠시 앉아 교수님에게 말했다.

“교수님 저 벌써 두 번째 암 수술이에요. 진짜 다시는 수술실에 들어오고 싶지 않아요.”

“걱정 마요. 내가 수술 잘할게. 다신 이 방에 안 들어오게 할게요.”

마취에서 깨고 병실로 올라올 때부터 시작된 울음은 영 멈춰지지 않았다. 첫 번째 암 수술에 비하면 이상하리만치 통증은 하나도 없었지만, 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환자분, 왜 울어요? 많이 아파요? 아파서 그런 거예요? 그 정도로 아프지는 않을 텐데?” 통증이 거의 없을 텐데 대성통곡하는 환자를 보며 간호사실이 분주해졌다.

”제가 벌써 두 번째 암 수술이어서요. 서러워서 눈물이 나요. 보호자 좀 불러주세요.“

첫 번째 암 진단을 받은 지 고작 3개월 만에 나는 암이 2개나 있는 기구한 팔자의 환자가 됐다. 억울해서 나는 눈물인가 싶었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던 것은 사실 다른 이유였다. 내 옆에 엄마가 없었다.

첫 번째 수술에서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혼자 대기실에서 서성이며 나를 기다려준 연인이 곁에 있었다. 엄마에게 말하지 않기로 한 것도 오롯이 내 결정이었다. 하지만 수술을 마친 내 곁에, 내 이름을 부르며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 줄 엄마가 지금 내 곁에 없다는 것은 날 무너지게 했다. 엄마가 곁에 없다는 것은 더 이상 괜찮은 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마음껏 울어도 되는 시간이었다. 엄마에게 말하지 않기로 한 내가 대견하다고 믿고 싶었지만, 그건 오만이고, 착각이었다.

”엄마 보고 싶어. 엄마가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

목 놓아 우는 나를 안고 남자 친구는 한참을 달랬다. 그가 건네는 어떤 다정한 말로도 내 울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엄마와 나 사이에 비밀이 생겼고, 엄마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이젠 엄마가 내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엄마가 그리워 밤새워 목 놓아 울만큼 서러운 일이기도 했다.


나 혼자만의 007작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유방암 1차 수술을 마치고 퇴원했다. 주먹보다 조금 작은 배액관을 3개나 달고 나왔다. 10명이 수술하면 고작 한 명쯤 재수술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교수님은 말했지만, 난 그 환자가 되어 2주 만에 또다시 수술실에 들어가게 됐다. 언제나 그랬듯 모든 것은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르게 흘러갔다.

배액관을 빼고 나서야 드디어 엄마를 보러 갈 수 있었다. 그리웠던 엄마 얼굴을 마주했다. 엄마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애써 눈을 피했다. 그리웠던 엄마 밥도 실컷 먹었다. 엄마의 아주 가까운 친구가 유방암에 걸렸다고 했다. 엄마는 친구가 항암치료 받으며,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말했다. 우리 딸은 다 끝나고 이제 건강해서 참 다행이라 말하며 엄마는 환하게 웃었다.

‘엄마 나는 또 아파. 다음 주에 또 수술해야 한대. 나는 엄마가 필요해’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죽을힘을 다해 꿀꺽 삼키고야 만다.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주말을 지내고 나서 난 다시 혼자 세 번째 수술을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오롯이 혼자 견디기로 한 것이 잘한 선택이라고 또 한 번 나를 토닥인다. 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안고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고 가슴이 아팠다. 가족에게 알리지 않기로 한 나의 결정이 과연 옳았는지, 4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 선택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그땐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분명히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평범한 마흔한 살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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