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여기까지

by naniverse

완벽히 몸이 회복되기 전이라도, 조금만 체력이 돌아오면 당연히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고, 책임이고, 성실이었다. 첫 번째 수술로 2달간의 휴직계를 냈고, 두 번째 암을 발견하면서 3달을 연장했다. 세 번의 수술과 다섯 번의 항암치료, 무려 44번의 방사선 치료는 8월 말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예상에 없던 두 번의 수술과 추가 치료들로 이미 온몸은 만신창이었다. 9월 7일로 예정되어 있던 복직은 누가 봐도 무리였다. 한두 달만 더 쉬면 어쩐지 사람답게 회사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신청했던 팀장 면담이다. 하지만 17년간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결정은 의외로 한순간에 나버렸다.


“휴직을 연장한다고요? 안 되는데… 그건 안 될 것 같은데요…”

“팀장님, 저 치료가 끝난 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 됐어요. 한 달 최대 두 달 정도 쉬면서 몸 회복하고 복직하겠습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매니저님이 복직해야 내가 회사를 그만둘 수가 있거든. 나 9월 말에 회사 그만둬요. 그러니 매니저님이 복직해서 팀장 달고 일해줘야 해요.”

오래 함께 일한 팀장은 아니었다. 그래도 오랜 시간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를 응원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그에게 어려운 투병을 마치고 휴직 연장을 요청하는 동료의 사정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여기로 돌아오면 나는 일만 하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미 숨이 막혔다. 물론 그의 결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물론 아니었다. 사소해 보이는 이 결정은 사실 수십억 원의 돈이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회사는 직원들의 퇴사 열풍에 아수라장이었다. 오랜 시간 상장 기회만 엿보고 있던 회사는 코로나 상장 붐을 타고 드디어 상장했다. 상장 직후 회사 주가는 끝을 모르게 치솟았다.

“ oo회사 '따상상' 직원 1인당 11억 '대박'…퇴사 러쉬 나오나”

온갖 기사들로 도배가 됐다. 미리 우리사주를 받아 두어 오매불망 상장만을 기다리던 직원들의 계좌에는 생전 처음 보는 금액이 찍혔다. 직원들이 하나둘씩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직원들은 우리사주 의무보유기간을 적용받아, 상장 후 1년이 지난 다음에야 주식을 팔 권리를 가졌다. 회사에 남아 1년 후 회사 주가가 지금보다 더 오르기를 기대할 것인지, 지금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우리사주를 정리해 당장 내 손에 들어온 거액을 거머쥘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1년 후 회사 주가를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퇴사를 선택했다. 수십 년 회사에 다닌 선임도, 회사를 얼마 다니지 않은 주니어들도 누구랄 것 없이 앞다투어 회사를 떠나갔다. 뉴스에서나 보던 ‘우리사주 대박’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로또를 맞은 많은 직원은 퇴사를 결정했다.


17년이었다. 나는 매니저 중 거의 최고 수준의 우리사주를 받았다. 회사를 떠나면 내 손에 상상도 할 수 없는 큰돈이 쥐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는 17년 동안 내 인생이 자라났던 곳이었다. 나는 돈을 따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깟 돈이야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 아니야? 라고 말했고, 떠나는 사람들은 내게 너무 순진하다고 했다. 온몸이 다 부서져 망가진 그때에도 나는 회사로 돌아가 나의 동료들과 함께 다시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팀장 면담을 하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회사를 떠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회사로 돌아와 팀장을 맡아 당장 일하라고 말하는 팀장의 얼굴에 대고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말했다.

”저 그럼 그냥 회사를 그만둘게요. 어차피 휴직 중이었으니 복직하지 않고 그냥 퇴사 절차를 밟으면 되겠지요?

“회사를 그만둔다고요? 나니 매니저가요?”

팀장은 이보다 더 황당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새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에서 ‘설마 그만두겠어? 일을 그렇게 좋아하는 네가?’ 하는 생각이 읽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에게도 그의 사정을 봐줄 여유란 없었다.

출근하고 있지 않았으니 딱히 정리할 것도 없었다. 이미 휴직하면서 짐은 오래전에 정리해 두었다. 내 휴직을 담당해 오며 내가 어떤 상태인지 어쩌면 팀장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던 인사팀 담당자에게 퇴사를 통보했다.

“나니 매니저님, 저 진짜 너무 아쉬워요. 남들은 다 돈 때문에 퇴사한다고 난리인데요. 매니저님 한두 달 더 쉬고 다시 오신다고 팀장님 면담하신다고 했잖아요. 근데 왜 갑자기 퇴사하시기로 하신 거예요? 매니저님 아픈 거 제가 너무 잘 알아서, 그만두지 말라고 붙잡을 수도 없고. 붙잡으면 안 되겠죠? 조금 더 쉬시다가 다시 오시면 안 돼요? 매니저님만큼 열심히, 열정적으로 일하는 직원 우리 회사에 없잖아요. 그동안 정말 고생하셨어요.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세요. ”

갑작스러운 퇴사에 오래도록 일해 온 사람들과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게 되어 마음이 쓰렸다. 인사팀 담당자의 따뜻한 마지막 한 마디가 고마웠다.


퇴사가 결정되고 며칠 후 사장님으로부터 전화받게 된 것은 의외였다.

“나니 매니저님. 그동안 정말 열심히 일해줘서 고마워요. 회사를 위해 얼마나 애써줬는지 알아요. 회사가 매니저님을 너무 많이 부려 먹어서 아프게 된 것 같아 내가 정말 미안해요. 언제든지 회사로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와요. 매니저님 자리는 언제나 비워둘게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작은 회사도 아니고 잘 나가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수천 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높디높은 자리에 있는 사장님이 팀장도 아니고 임원도 아닌 일개 매니저 나부랭이의 퇴사에 관심을 두다니. 그래도 17년 동안 열심히 일한 보람은 있네, 하는 생각과 함께 나름 찬란했던 나의 회사 생활은 사장님의 안부 전화를 마지막으로 드디어 끝이 났다.


어떤 사람은 내가 나를 소모품으로 생각했던 팀장에 대한 복수심으로 퇴사를 결정했다고 생각했다. 아픈 사정을 상세히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들은 너도 결국 돈을 좇았구나.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내가 잠시 쉬다가 당연히 다른 회사로 이직을 준비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퇴사를 결심하던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다시는 회사라는 곳에 나를 소속시키지 않겠다고.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병든 몸을 이끌고도 당연히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바보였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예가 된 줄도 모르고 내가 있을 곳은 회사밖에 없다고 여겼다. 유치원부터 지금까지 소속이 없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상상해 본 적 또한 없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살 것인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저 회사의 소모품으로 일만 했던 삶을 더 살고 싶은가?‘

답은 명확했다. 더 이상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면서 비로소 내 삶을 살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회사를 떠나 처음으로 ‘나의 삶’을 살기로 했다. 회사의 문을 나서는 순간, 처음으로 ‘나’라는 사람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 알람과 함께 일어나야 할 이유가 사라진 아침. 그때부터 나는 백수로서의 삶을 배워야 했다.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 체력과 밤마다 이어지는 불면 속에서, 이제 나는 암 환자의 삶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해야 했다. 그 배움의 시간은, 뜻밖에 길고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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