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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의 반격

직장 내 괴롭힘, 여덟 번째 이야기

by 난주

"택시가 신호에 걸렸을 때 문을 열고 도망쳤어요."

"그다음에는요?"

"달렸어요. 회사까지 계속 달렸어요. 보안요원이 나왔어요. 괜찮냐고, 무슨 일이냐고... 남편이 올 때까지 그 분과 기다렸어요."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안 하셨나요?"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경찰서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도망칠 곳은 사무실밖에 없었거든요. 그리고 회사 입장도 생각해야 하잖아요. 괜히 말이 새어나가면 안 되니까... 이것도 직업병인가 봐요."


끔찍한 기억을 가벼운 농담으로 희석하려는 듯 서 과장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보며 인사팀 백 과장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일 년 전 홍보팀에 합류한 서 과장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었다. 선이 고운 외모와 친절한 태도는 부드러워 보였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강한 추진력과 확고한 결단력을 지니고 있었다.


임직원의 팔 할이 남성인 제조업. 그것도 일주일에 서너 번씩 술자리를 감당해야 하는 홍보팀에서 유일한 여자 과장이었던 그녀가 성공적으로 적응한 데에는 이러한 기질이 한몫을 했다.



그러나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그녀에게도 예기치 못한 복병이 찾아왔다.


신제품 출시와 더불어 서 과장은 공격적인 홍보를 진행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업무 추진을 위해 마케팅팀, 해외사업팀 등 다양한 부서와 협업이 필요했지만 그중에서도 제품의 특징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신사업팀과 긴밀하게 공조해야 했다.


신사업팀 담당자는 전 대리로 190cm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풍채와 유난히 큰 목소리가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주변이 좋고 제품에 대한 이해도 있었지만 선임들의 의견까지 묵살해 가며 자기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단점이 있었다. 회의시간마다 쉴 새 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전 대리를 보며, 서 과장은 적지 않은 피로감을 느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가 그녀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직급도, 나이도 더 위인 서 과장에게 전 대리는 친근함을 가장해 선을 넘는 말들을 건네곤 했다.


"과장님, 구두 잘 어울리시네요. 발이 예뻐서 그런가? 남자들이 발 예쁜 여자 좋아하는 거 아시죠?"

"누가 우리 과장님을 유부녀라 하겠어. 왜 일찍 결혼해서 제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

"남편이 늦게 들어온다고 뭐라고 안 해요? 나 같으면 이렇게 예쁜 마누라 밖에 못 내놓을 거 같은데."


농담과 희롱 사이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그의 발언에 수치심과 불쾌감을 느낀 서 과장은 정색을 하고 그만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전 대리는 왜 예민하게 반응하냐며 대충 상황을 모면하려 했지만 서 과장이 단호한 태도를 보이자 은근히 기가 질렸는지 말과 행동을 주의하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서 과장은 급변한 그의 행동에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원활한 업무 진행을 위해 이 정도로 상황을 정리하고 넘어갔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고 담당 임원인 이 전무는 고생한 직원들을 위해 회식 자리를 마련했다. 여전히 어색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서 과장과 전 대리도 회식에 참여했다.


전 대리와 일부러 먼 자리를 골라 앉은 서 과장은 프로젝트가 잘 끝났다는 기쁨과 함께 그를 더 이상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오랜만에 미소를 띠며 대화에 참여했다.


그러나 회식이 끝나고 서 과장이 택시에 올라타는 순간 전 대리가 급하게 그녀를 밀며 택시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대리님, 왜 이러세요. 같은 방향도 아니잖아요."

"오늘 여자친구 생일이라서요. 기사님, 빨리 출발해 주세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서 과장은 곧바로 택시에서 내리려 했지만 전 대리는 여자친구까지 들먹이며 택시를 출발시켰다. 겁에 질려 잔뜩 웅크리고 있던 서 과장에게 전 대리는 격앙된 목소리로 이해하기 힘든 말들을 늘어놓았다.


"과장님, 제가 좋아하는 거 아시죠? 근데 왜 이렇게 저를 힘들게 하세요."

"대리님,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것 같네요. 내려서 다른 차 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기사님, 다음 신호에 세워주세요."

"아니야.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정말 왜 그러는 거야!"


전 대리는 산채만 한 덩치로 서 과장을 덮쳐오며, 듣기 거북한 사랑 고백을 난사했다. 경악한 서 과장은 자신도 모르게 신고 있던 하이힐을 벗어 그의 몸을 있는 힘껏 내쳤다. 놀란 기사님은 마침 걸린 신호에 맞춰 차를 세웠고, 서 과장은 하이힐을 손에 든 채 거리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서 과장은 내부 절차를 통해 전 대리를 성희롱으로 고발했고, 상사인 이 전무에게도 메일을 통해 그간의 행적을 공유했다.


결국 전 대리는 두 달간의 정직을 거쳐 직원이 두 명뿐인 오지의 사업장으로 전출되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가 오래 사귄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서 과장은 한 동안 병가를 내고 상담 치료까지 받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굴하지 않고 업무에 복귀했다.


그녀는 하이힐에 발을 넣을 때마다 그날 일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겠지만 동시에 그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들었던 용기와 근성을 상기하며 또각또각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본 사례는 여러 사람과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특정 인물이나 회사를 식별할 수 없도록 각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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