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의 쉼, 첫 번째 이야기
문을 열면 뜨겁고 습한 공기가 온몸을 에워쌉니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도를 닦고 계신 어르신과 이태리타월로 아이 등을 밀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얀 플라스틱 대야와 앉은뱅이 의자도 추억 속 풍경 그대로입니다.
검은 속옷 차림으로 카리스마를 내뿜던 세신사들과 얼굴에 찍어 바르던 요구르트 팩은 사라졌지만, 오랜만에 찾은 동네 목욕탕은 정겨운 온기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북유럽 감성을 덧입히려는 듯 '사우나'라는 간판을 내걸기는 했지만 더운물에 몸을 담가 묵은 때를 벗겨내는 오래된 의식은 여전히 목욕탕의 몫이죠.
이런 추억과 생각을 되새기며, 저는 목욕탕 문을 밀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 손에 이끌려
나이가 차고 나서는 친구들과 어울려
늘 함께 찾았던 목욕탕을
홀로 방문한 것은 처음이라 살짝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의 저는 목욕탕의 터줏대감들이 두려웠습니다. 이름표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닌데 자신의 자리를 주장하며 비키라고 하시는 어머님, 70도를 웃도는 사우나실의 열기를 견디지 못해 달아나려고 하면 문 자꾸 여닫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호통 치시는 어르신, 셜록 홈스보다 예리한 눈초리로 벗은 몸을 사정없이 스캔하시는 여사님 앞에서 괜히 주눅이 들었죠.
그러나 저는 더 이상 수줍음 많은 소녀가 아닙니다. 이제는 국군장병 지원 행사에 참석해서도 앳된 장병들을 서슴지 않고 안아주는 어머니이기에 힘차게 목욕탕에 입성했습니다.
평일 오후 2시의 목욕탕은 생각보다 붐볐습니다.
가장 인기가 많은 온수탕은 이미 어르신들로 꽉 차 있었고 샤워를 할 수 있는 자리도 몇 개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직장생활에서 얻은 눈치와 독박육아에서 얻은 추진력으로, 저는 편히 샤워를 즐길 수 있는 안쪽 자리를 선점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세면용품으로 영역 표시까지 마친 후 유유히 온수탕에 몸을 담갔습니다.
하아- 시원하다
드라마 속 부장님들이 내뱉던 감탄사가 제 입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는 것도 잠시 경직되어 있던 몸이 노곤노곤하게 풀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11월, 한낮의 목욕은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터줏대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아직 어린아이의 목욕을 도와주지 않고
저는 오랜만에 자유롭고 편안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했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여유롭게 머리를 말리며, 거울 속에 비친 저를 보았습니다. 젊은 시절만큼 탄력 있고 날씬하진 않지만, 오랜 세월 묵묵히 동행한 몸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참 고생했어.
앞으로도 아프지 말고 함께 가자.
향이 좋은 로션을 찬찬히 발라주며 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제가 씻겨주고 돌본 것은 몸인데 이상하게 마음까지 위로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집에 가면 또 정신없는 하루가 기다리고 있겠죠. 하지만 몸과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충전했으니 오늘만큼은 더 힘차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단한 삶을 버티다 보면 몸과 마음에 까맣게 때가 낍니다. 그럴 때면 동네 목욕탕을 찾아 기운을 충전합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고 수고한 자신을 토닥이고 나면, 묵은 때가 지워지고 새로운 여백이 생겨납니다.
확장된 여백 안에 더 넓고 깊은 세상을 들여놓을 내일을 기대하며, 한낮의 목욕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