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서 내는 날

확장의 쉼, 네 번째 이야기

by 난주

드디어 사직서를 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라 정의 동요가 없을 줄 알았는데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건 어쩔 수 없네요. 몇 번 이직을 했지만 다음 거취를 정하지 않고 사직서를 낸 건 이번이 처음이라 더 그런가 봅니다.


지난 스무 해 동안 쉬지 않고 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기업에서 조직 하나를 책임지는 리더 직함을 받고 매스컴에도 종종 얼굴을 비추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책만 읽던 맏딸의 이름이 사회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셨지만, 사실 저는 참 많이 외로웠습니다.


업무를 배우고 성과를 내는 과정 자체는 즐거웠습니다. 서로 믿어주고 끌어주는 좋은 동료들과 함께 하는 것도 행복했습니다. 제가 수행한 업무를 통해 타인이 도움을 받는 것을 목격할 때면 가슴이 일렁일 만큼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연차가 쌓이고 직책이 올라갈수록, 업무보다 정치가 우선되는 현실이 힘겨웠습니다. 용납할 수 없는 상사의 만행을 묵인하기 어려웠고, 보호해야 할 직원을 내몰아야 하는 상황에 동조하기 힘들었습니다.


자네는 가끔 친절한 금자씨 같아.


술만 마시면 직원들에 대한 평을 늘어놓던 예전 상사분의 말이 조금은 맞는 것도 같습니다. 세상 물정을 몰라 아이까지 빼앗겼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누구보다 서늘해지는 금자씨처럼, 평소에는 약지 못해 손해를 보다가도 선을 넘는 상황이 오면 매섭게 날을 세우는 구석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사직서를 쓰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몸이 무거워지면 자리가 없어.

밖은 더 추워. 눈 딱 감고 조금만 더 버텨.


앞서 퇴사한 선배들의 조언처럼 리더급의 이직 시장은 겨울바람처럼 매섭고 황량했습니다. 팀장일 때만 해도 수십 통씩 걸려오던 헤드헌터들의 전화는 조직장이 된 후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어쩌다 운 좋게 연결이 되어도 진행이 어찌나 더딘지 면접 한 번 보는데 몇 달이 걸렸습니다.


잔고는 줄어들고 이직은 막막하고, 솔직히 복귀를 해야 하나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비빌 언덕 하나 없는 제가 신념을 따르는 건 사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는 타협하지 않는 쪽을 택했습니다.


생활의 여유도, 앞날의 계획도 부족하지만 최소한 아이에게 부끄러운 부모는 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끝까지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일은 참으로 오묘해서 막상 퇴사를 결심하고 나니 그제야 함께 일하고 싶다는 곳들이 나타났습니다. 오매불망 기다릴 때는 오지 않더니 모든 것을 내려놓자 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결론이 난 상황은 아니라 더 지켜봐야겠지만 어쨌든 일할 기회가 있음에 감사합니다.


새해에는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저는 앞으로도 친절한 난주씨로 살아갈 것 같습니다. 제 안에 남은 말들은 좋아하는 그림책을 통해 나누는 것으로 대신하며, 오늘의 쉼을 마무리합니다.



『두 갈래 길』 - 라울 니에토 구리디


인생은 길과 같아

길 위에는 신기한 것도 많고 두려운 것도 많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고

잠시 멈춰 고민에 잠길 때도 있어.


가끔은 굉장히 빨리 지나가.

반대로 너무 느릴 때도 있지.

밤처럼 온통 캄캄할 때도 많지만

뜻밖의 재미있는 일들도 많아.


장애물이 나타나기도 하지.

그래도 걱정은 마. 뛰어넘으면 되니까.

친구와 다투기도 할 거야.

온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고

말없이 걸어야 할 때도 있어.


이 모든 길들이 너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줄 거야.

그 순간 인생은...... 찬란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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