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의 쉼, 첫 번째 이야기
출근을 멈춘 후
조용하던 몸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습니다.
너 진짜 너무한다.
나 그동안 겨우 버틴 거 알지?
맨날 마음의 소리만 듣지 말고
이제 나 좀 챙기는 게 어때!
직장 생활 20년, 독박 육아 10년 만에 만신창이가 된 몸이 그제야 보였습니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더니 퉁퉁 붓고 쿡쿡 쑤시는 신체가, 거울 속에서 저를 째려보고 있었습니다.
필라테스 선생님이 보셨다면 경을 쳤을 거북목과 말린 어깨.
염증으로 뒤덮인 위장, 통증으로 욱신거리는 팔목과 발목.
출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기에는 염치가 없는 충만한 뱃살.
안팎으로 망가진 몸을 보며, 미안한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그날 이후 몸에게 제대로 된 쉼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잘 먹고 잘 자기.
원초적이고 절대적인 쉼으로 기본 체력을 비축한 후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웬만한 러너를 능가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멋지게 달리고 싶었지만 부실한 무릎과 발목이 받쳐주지 않아 걷기로 방향을 선회하였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반년 동안 매일 걸었습니다.
한 달에 수십만 원씩 들던 PT비용을 아끼고, 걷기 앱을 4개씩 돌리며 편의점 쿠폰과 서점 포인트를 획득하는 재미가 의외로 쏠쏠했습니다. 계절마다 변화하는 풍경을 감상하고, 미처 몰랐던 동네 풍경을 발견하는 기쁨도 적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몸의 변화였습니다.
삼천 보만 걸어도 숨이 차던 체력이 만 보도 거뜬히 걸을 만큼 회복됐습니다. 발바닥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사라졌고, 저녁이면 무겁게 올라오던 붓기도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행복했던 건 잃었던 허리선을 되찾은 일이었습니다.
체중은 크게 변화가 없었지만 허리둘레가 5cm나 줄어들었습니다. 아직도 젊은 시절 입던 청바지를 입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허리와 배가 구별되는 사람으로는 돌아왔습니다.
한낮 기온이 37도까지 올랐던 여름날,
연신 땀을 흘리며 걷던 저를 발견하고 어이가 없어 웃던 날이 기억납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무언가에 몰입하는 일.
그것이 저에게는 약이 되고 쉼이 되었습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 깃든다는 말처럼 걷기는 피폐해진 몸을 일으켜 세우는 동시에 엉켰던 마음도 풀어 주었습니다.
날이 추워진 이후 걷는 횟수가 급격히 줄었는데 이 글을 쓰다 보니 다시 걷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내일은 목도리와 장갑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가장 좋아하는 골목길을 걸어봐야겠습니다.
덧.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선물 아닌 선물, 특집 아닌 특집으로, 아름다웠던 초가을 동네 풍경과 수시로 저를 위협했던 비둘기들의 모습을 나누며 오늘의 쉼을 마무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