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곡점을 위한 전주

<유미의 세포들 시즌2> 한 장면을 담으며

by 난주
고작 이 정도 재능으로
작가가 되겠다고 호기를 부렸나.

잔고는 점점 줄어드는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회사를 다니면서 준비할 걸
괜히 퇴사를 했나.

공모전 결과를 확인한 유미는 방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유미의 세포들 시즌2> 한 장면을 담으며.


20년 만에 휴직을 하고

21년 만에 퇴사를 했다.

생애 처음으로 무직자가 됐다.


계획했던 일이 아니어서일까.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일까. 쉬게 되었다는 기쁨보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공허함이 앞섰다.


그때 내 감정을 다독여 준 것이 바로 글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브런치에 연재 글을 올리고, 책과 영화에 관한 블로그도 시작했다. 내 이름으로 책을 출간한 것도 아니고 신춘문예 공모에 당선된 것도 아니지만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오롯이 행복했다.


돌아보면 나는 늘 작가가 되고 싶었다. 벌이는 시원치 않아도 글을 써서 먹고사는 삶. 그것이 오랜 바람이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 내게는 꿈이 아니라 돈이 필요했다. 작가는 가난을 면하기 힘들 거라는 적중률 97.8%의 예측으로 나는 결국 직장인의 길을 택했다.


어쩌면 세상은 좋아하는 일보다 필요한 일을 해야 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유미의 세포들 시즌2> 속의 주인공 유미(김고은)도 작가의 꿈을 가슴 한편에 밀어 두고 회계팀 대리로 생활을 이어간다. 꿈을 접어둔 사람들답지 않게 유미와 나는 회사 생활에 곧잘 적응한다. 맡은 업무를 책임감 있게 수행하고 동료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 꽃미남 남친을 사내에서 획득한 유미와 달리 나는 사내 연애는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대신 임원급 타이틀을 거머쥔다.


그러나 따박따박 찍히는 월급으로 눌러 두었던 우리의 꿈은 예기치 못한 자극을 통해 터져 나온다. 회사에서 갑자기 글 쓰는 업무를 맡게 된 유미와 직장에서의 괴로움을 글로 풀기 시작하던 나는, 결국 퇴사라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는 방바닥에 누워 생각의 꽈리를 틀고 있다.


늘어난 니트를 입어도 청순미가 뿜어 나오는 김고은에 빙의할 순 없지만 나는 어느새 화면 속 유미가 되어 감정을 공유한다.


이 나이에 꿈을 좇는 건 무모한 일 아닌가.

지금 가진 돈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다시 회사에 들어가는 게 현실적인 선택이겠지.


취업보다는 퇴직이 가까운 지금, 나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뒤늦은 자아 탐색을 하고 있다.


어떤 날은 갑자기 걸려온 헤드헌터의 전화에 이력서를 내볼까 망설이며, 또 어떤 날은 회사라는 우물을 벗어나 전혀 다른 길을 걷는 나를 상상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자 한 아이의 엄마로서, 이러한 고민의 시간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꽃이 채 피기도 전에 무거운 짐부터 짊어졌던 앳된 나를 떠올리며 생에 한 번은 이런 시간을 스스로에게 선물하고 싶다.


나의 앞날이

자신의 길을 찾은 유미처럼 환히 빛날지

다시 회사에 들어가는 것으로 귀결될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질지 알 수 없지만

잠시라도 하고픈 일을 하며 꿈을 꾸려한다.


방바닥에 누워 수많은 감정을 흘려보내고 다시 일어서는 일.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변곡점을 위한 전주일 테니까.



올해 처음 만난 봄꽃입니다.

꽃 같은 하루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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