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형 리스트는 잠시 접어두고

<머티리얼리스트> 한 장면을 담으며

by 난주
데이트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해요.
시행착오도 많이 겪고
막대한 리스크와 괴로움이 따르죠.

사랑은 쉬워요.
사랑은 우리가 어떻게 못하니까요.
가끔 우리 인생에 걸어 들어올 뿐이지.

- 영화 머티리얼리스트(Materialists) 중


나이가 들어서인지, 잡담에 능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가끔 연애 상담을 청해 오는 후배들이 있다. 그때마다 심리학 학위도 없고 연애와 결혼에서 모범을 보이지도 못한 내가 상담을 해도 되나 고민이 되지만 일단 들어주고 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성별보다는 연령대에 따라 상담 내용이 달라지곤 한다. 사회초년생들이 연애 그 자체를 두고 고민을 한다면, 30대 중반 이후의 후배들은 결혼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꺼낸다. 영화 《머티리얼리스트》 속 대사를 빌리자면, 사랑이 데이트로 진화한다고 해야 할까.


경제적, 사회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자립을 이루고, 이제 '결혼'이라는 목표를 향해 화살을 날리는 이들.

영화 속에서 유능한 커플매니저로 등장하는 루시(다코타 존슨)는 이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는다.


키 180cm 이상, 억대 연봉의 40대 초반 남성.

날씬한 몸매를 가진 30대 중반의 전문직 여성.


망설임 없이 조건을 나열하는 그들을 보며 루시는 때로 회의감에 젖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원하는 '이상형'을 찾아 대령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원하는 조건에 최대한 부합되는 후보를 데려와도 그들의 데이트는 엉망이 되기 일쑤다.


매칭 전문가인 루시 본인조차도 이상형인 '가슴이 떨릴 정도로 부유한 남자 해리(페드로 파스칼)'와 '가난 때문에 헤어진 전 남친(크리스 에반스)' 사이에서 방황할 정도니, 조건은 데이트의 문을 열어줄 순 있어도 성공을 담보할 순 없나 보다.


결국 데이트의 성공을 좌우하는 건 거창한 조건이 아니라 사소한 순간이다.


다정하고 배려 있는 말투.

계속 듣고 싶은 웃음소리.

이야기를 경청하는 눈동자.


그런 순간들이 모여 데이트를 성공시키고 사랑에 빠지게 한다.


루시의 말처럼 나는 데이트와 사랑이 무 자르듯 나눠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첫 만남에서 전류에 감전된 듯 반하는 사랑도 있지만 여러 번의 데이트를 통해 차근히 쌓이는 사랑도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노력이 필요한 데이트에 비해 사랑은 저절로 다가온다는 점에는 백분 공감한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루시가 육각형의 매력을 갖춘 해리와 근육 대신 우수 어린 눈빛을 장착한 캡틴 아메리카 중 누구를 선택했는지는 비밀로 남겨두려 한다. 그러나 동화책에나 어울릴 것 같은 그녀의 선택이 내게는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졌다는 것만은 말하고 싶다.


설레는 봄, 이상형 리스트는 잠시 접어두고 과감히 사랑에 풍덩 빠져 들어보기를 권한다. 김치 싸대기를 부르는 불륜만 아니라면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고 해도 좋을 계절이니까!




<머티리얼리스트>는 한국계 감독 셀린 송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넘버 3>를 연출한 송능한 감독의 딸인 그녀는 <패스트 라이브즈>로 전미 비평가 협회상 작품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오늘날의 사랑을 밀도 있게 포착한 그녀의 작품들을 보며, 따스한 봄날 한켠을 사랑으로 채워보시길 바랍니다.


머티리얼리스트1.jpeg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