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튀기면 속까지 제대로 안 익어. 기름이 고였다가 터질 수도 있고. 이렇게 칼집을 내줘야 고루 익고 기름도 안 튀어."
삶의 교훈은 언제나 일상의 순간에서 온다.
일 년을 내리 고민하던 문제의 해답을 아이의 물음 하나에서 구할 수 있었다. 이 악물고 버텼던 낮들과 뜬 눈으로 지새웠던 밤들은 결국 모두 나에게 필요한 칼집이었다. 세밀하고 날카로운 칼로 선명하게 아로새긴 칼집은 지금의 나를 더없이 아프게 하지만 다가올 나의 삶에 윤기와 풍미를 더해줄 것이다.
<오늘도 출근하는 당신에게>를 연재하기 시작할 무렵 나는 속이 까맣게 삭아 들어가고 있었다.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말로는 다하지 못할 만큼 비열하고도 파렴치한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반복하는 상사와 동료로 인해 업무 의욕은 물론 삶의 기쁨마저 증발하고 있었다.
반년이 채 되지 않아 조직의 절반을 넘는 인원이 퇴사를 감행했고 오랜 기간 힘을 모아 이룩한 성과와 평판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더 이상 버티기는 힘들겠다는 판단에 옮겨갈 곳을 찾아보았지만 중년의 나이와 무거운 직급은 이마저도 여의치 않게 만들었다.
원래 맑은 날보다 궂은날이 많은 것이 직장 생활이라지만 이십 년 간 부단히 노력하고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풍랑 앞에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허망하고 분통해서 몸과 마음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었다.
그런 나를 일으킨 것은 아이의 한 마디였다.
칼집을 내는 이유에 대한 아이의 물음은 나에게 삶의 본질과 연단의 과정을 일깨워 주었고 또 다른 성숙의 기회를 주었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일들인데
떠나고 나면 다시 볼 사람들도 아닌데
돌아보면 훨씬 힘들었던 때도 많은데
직장 생활이 인생의 전부도 아닌데
이 고비만 넘기면 좋은 날이 찾아올 텐데
딱 한 발만 떨어져서 바라보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상황인데 문제에만 매몰되다 보니 나의 시야는 잔뜩 좁아져 있었고 나의 몸과 마음은 메마른 사막처럼 피폐해져 있었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 시작한 직장 생활은 삶을 위협하는 괴물이 되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괴물을 피해 달아날 수도 있었지만 나는 타고난 성정과 주어진 여건 탓에 이번에도 버티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삶의 여백부터 되찾아야 했다.
뒤를 받치고 있는 새하얀 여백 덕분에 유려한 선과 말간 색상이 더욱 빛을 발하는 동양화처럼 직장 생활을 제대로 버텨내려면 반드시 여백이 필요하다.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강하게 내달려야 할 때도 많지만 완급을 조절하며 숨을 고르는 과정이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
수십 년 간 나의 직장 생활을 지켜 준 가장 큰 아군은 삶의 여백이었다. 항상 곁을 지키는 책들,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목적지 없이 무작정 걸음을 옮기는 산책, 아이와 둘만 떠나는 여행, 사랑하는 이와 음미하는 한 그릇의 음식, 매일 밤 드리는 혼자만의 기도와 같이 형태는 모두 달랐지만 나를 돌아보고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여백이 늘 뒤를 받쳐 주었다.
그러나 수행해야 할 역할이 늘어나고 책임져야 할 사람이 많아지면서 내 삶의 그림 속에는 여백이 점점 사라져 갔다. 그림을 그려 넣을 자리가 없으니 인생의 문제가 터지면 구덩이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릴 뿐 벗어날 방도를 찾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나는, 브런치 연재를 시작했다.
삶의 여백을 되찾기 위해서 잠을 줄여가며 글을 썼다. 계속 늘어만 가는 직장 업무와 쉴 틈 없이 계속되는 육아로 가끔씩은 연재를 하는 것이 삶의 여백을 확보하기보다 또 다른 짐을 늘려가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글을 올렸다.
시간이 지나며 구독자가 늘어나고 댓글이 달리면서 나의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는 작은 기쁨이 생겼다. 하지만 더 큰 수확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짐을 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의 좋은 글을 통해 새로운 삶의 희망과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상상하기도 힘든 비극을 겪고도 묵묵히 글을 써 내려가는 작가님, 풍부한 연륜으로 삶의 순간들을 관통하는 혜안을 보여주는 작가님, 동시대를 살아가며 느끼는 비슷한 고민들을 나눠 주는 작가님,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통해 신선한 해답을 제시하는 작가님들을 보며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이겨내고 버틸 수 있었다.
결국 나는 글을 적고 내보이는 것을 넘어 타인의 글을 보고 되새기는 것으로 삶의 여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아직도 나의 직장 생활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못된 상사와 동료는 여전히 건재하고 나의 조직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다. 그러나 이 상황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과 이 문제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달라졌다.
더 이상 직장은 나의 역량을 발휘하는 유일한 무대가 아니며 나에게 배움을 주는 독보적 대상도 아니다. 브런치 연재를 통해 나는 평생 바라 왔던 작가의 꿈을 미약하게나마 실천으로 옮기고 있으며 평생 사랑해 온 글로 소통하며의미 있는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내 삶의 그림 속에 새로운 여백이 다시 생겨났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나의 직장 생활에는, 아니 나의 삶에는 칼날처럼 고통스러운 순간이 빈번하게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십 년간 치열하게 부딪히고 온 힘으로 버틴 끝에 내가 얻은 교훈은 삶의 여백을 확보하고 견디는 한 동틀 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수많은 글쟁이가 눈부신 필력을 자랑하는 브런치에서 지극히 평범한 나의 글이 주목을 받지 못할 수도 있지만 오랜 기간 험난한 직장 생활을 헤쳐 온 나의 경험이 지금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직장인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나 조언을 건네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웃으며 출근하길!
* 이번 화를 마지막으로 <오늘도 출근하는 당신에게>를 완결합니다. 첫 연재에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더 좋은 글로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