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단한 노력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일궈 낸 경영자가 꼽은 성장의 동기,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무고한 사람을 잔인하게 해친 범죄자가 털어놓은 죄의 시발점은 모두 '말 한마디'에 있었다.
때로는 봄바람처럼 따스하게
때로는 한파처럼 차디차게
때로는 왈츠처럼 경쾌하게
때로는 먹구름처럼 음울하게
때로는 엄마 손길처럼 보드랍게
때로는 주먹질보다 뼈아프게
말은 세상 그 무엇보다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우리를 흔들어 댄다. 아무리 감정의 변화 폭이 좁고 타인의 반응에 무심한 사람이라 해도 살면서 한두 번은 말 한마디에 행복하고 말 한마디에 우울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평생을 함께 할 배우자를 선택하는 조건 중에도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란 항목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이미 말 한마디의 중요성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중요성과 영향력을 익히 알면서도 정작 말 한마디를 신중하게 골라, 정갈하게 내어놓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인생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직장에서도 깊은 생각과 배려가 담긴 의미 있는 말보다는 아무 생각과 배려 없이 마구 내뱉는 가치 없는 말들이 난무한다.
문제는 직장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시간과 영역이 심히 방대하여서 그곳에서 빚어지는 나쁜 말의 찌꺼기가 우리 몸과 마음속으로 깊이 파고든다는 것이다. 가게나 식당, 학원, 운동센터 등 우리 삶의 다양한 공간에서 발생하는 나쁜 말은 그곳에 다시는 가지 않음으로써, 혹은 적절한 방법으로 항의를 함으로써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매일 출근하여 꼬박 여덟 시간을 보내다 오는 삶의 주된 터전에서 나쁜 말을 들을 경우 우리는 그 충격과 상처를 다스리기 쉽지 않다.
실제로 고용노동부에서 조사한 <2022년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제도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폭언이나 험담과 같은 '말'이 직장 내 괴롭힘의 주요 가해행위로 지적되고 있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거나 목격했다고 응답한 근로자 가운데 가장 많았던 유형은 폭언이 61.4%(189건), 따돌림과 험담이 49.7%(153건)로 사실상 대부분의 가해행위가 '말'에 근간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나 역시도 폭언과 험담을 들었을 때 가장 큰 괴로움을 맛보았다. 전후 관계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분노의 말을 쏟아낸 상사, 자신의 비겁한 언행을 은폐하기 위해 나에 대한 거짓 험담을 퍼뜨린 후배로 인해 나는 밤잠도 이루지 못할 만큼 울분을 느껴야 했다. 그 뒤로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마음속에박힌 나쁜 말의 찌꺼기는 심한 화상 자국처럼 아물지 않고 남아 있다.
'말'이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해서 받은 만큼 돌려준다고 해도 완벽하게 한이 풀리진 않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정신으로 심한 인신공격을 시전 한 상사에게 자존심을 박박 긁는 직설 화법을 돌려준 적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게다가 '말'의 생존력은 또 얼마나 지독한가. 방금 개켜놓은 양말도 찾지 못하는 나지만 20년 전 첫 사수가 뱉어 낸 못된 말 한마디는 머릿속에 아로새긴 듯 남아 있다.
형태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아마도 직장 생활을 일정 기간 이상 지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로 인해 상처받고 분개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말'로 인해 직장 생활을 버틸 수 있는 동력과 여유를 확보한 사람도 적지 않다.
사회초년생 시절 업무 실수를 저지르고 속상함과 창피함에 주눅 들어 있을 때 들려온 선배의 격려 한 마디, 승진을 앞두고 견제하는 세력의 모함에 억울해하고 있을 때 들려온 동료의 위로 한 마디, 하는 일마다 트집 잡는 상사의 진상 짓에 지쳐 있을 때 들려온 후배의 응원 한 마디가 나를 오랜 시간 직장에서 버티게 했다.
따스한 말 한마디를 하는 데에는 시간도, 힘도, 돈도 들지 않지만 거기에는 그 어떤 명약보다도 고단한 사람을 회복시키는 힘이 있다.
때로는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양계장에 갇힌 닭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몸과 마음을 혹사해 가며 직장 생활을 근근이 이어가는 우리가 가여울 때가 있다. 지나친 경쟁과 추악한 아귀다툼이 적지 않은 직장 생활을 버티느라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우리가 안쓰러울 때가 있다.
이럴 때 우리를 어미새마냥 품어주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은 바로 따스한 말 한마디이다. 급여 상승도, 승진도, 이직이나 퇴직도 모두 우리에게 만족과 행복을 안겨줄 수 있다. 그러나 직장이라는 삶의 전투 현장에서 지친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를 회복시켜 줄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득이 아니라 마음에 전해지는 말의 온기뿐이다. 그리고 그 온기를 서로 전해 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직장 생활을 버티기 위한 가장 현명하고도 따뜻한 처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