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에 욕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딱히 목을 맨 적도 없다. 때가 되면, 성과를 내면 올라가는 것이 승진이고 남들보다 너무 늦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회초년생 때는 고속 승진을 한 40대 임원 분들을 동경하기도 했지만 연차가 쌓일수록 빠른 승진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생각들 속에 나는 동기들보다 빠른 속도로 승진을 했고 하나의 조직을 전담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리더가 되면서 기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많은 중압감을 느꼈다.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지, 조직 구성원들을 잘 이끌 수 있을지, 지속적인 성과를 창출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리더십과 관련된 자료를 탐독하고 주변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스스로 밤잠을 설쳐가며 생각을 이어간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이자 다짐은 앞으로 더 열심히 업무에 매진하자는 것, 조직 구성원들에게 관심과 지지를 아끼지 말자는 것, 단기적인 성과에 연연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참으로 당연하고도 단순한 원칙들이지만 수많은 상급자들이 지키지 않았던 기본을 제대로 준수하는 리더가 되는 것, 그것이 나의 바람이었다.
그로부터 수 년 동안 스스로 세운 원칙들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조직 구성원들에게 진심으로 관심과 지지를 표했으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직의 성과를 조망했다. 그 결과 조직 구성원들은 나를 믿고 따라주었고 한 마음으로 함께 노력한 결과 주요 프로젝트들이 업계 최초, 업계 최고라는 수식어를 받을 정도로 인정을 받고 조직에 대한 대외적 관심과 인지도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수 년에 걸쳐 차곡차곡 쌓아 온 노력들은 악질 상사의 칼부림이나 사내 정치의 뒷공작에 모래성마냥 쉽게 무너져 내렸다. 조직 구성원 모두가 힘을 모아 공들여 쌓아 온 탑이 순식간에 휘청되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분노와 배신감이 일었지만 결국 내가 리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직을 처음 구성하는 것부터 운영하고 관리하며 성장시키는 것까지 모든 권한과 의무가 나에게 주어졌지만 그것을 한 순간에 뒤집어 버리는 결정권은 내가 아닌 직장에게 있었다. 리더로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은 성실하게 근무하고 유능하게 성과를 내고 사려깊게 구성원들을 살피는 것을 넘어 사내 정보와 동향에 귀와 눈을 열고 닥쳐올 위기를 예감하며 방비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눈에 띄는 성과는 비슷한 직급의 리더들에게 시기와 견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끈끈한 조직 분위기는 세력을 조성하는 것으로 비춰져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것, 때로는 맡은 일을 제대로 수행해내는 것보다 주변 상황을 널리 살피고 빠르게 처세하는 것이 리더에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기회를 통해 배우게 되었다.
그 후로 일 년, 나는 20년의 직장 생활 중 가장 힘들지만 가장 많이 성장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상황에 순응하고 때를 기다리기보다는 불의에 대응하고 맞서는 성향이라 여전히 불편한 상황이 계속 연출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때로는 분노가 치밀어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억울한 마음에 사직서를 던져 버릴까, 휴직을 해버릴까 고민하기도 하지만 결국 나는 묵묵히 버티는 쪽을 택했다.
이런 선택을 한 배경에는 가족을 위해 벌이가 멈춰져서는 안 된다는 현실적인 이유와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할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이성적인 판단이 있었지만 그보다도 앞으로 더 현명하고 안전하게 리더 역할을 해나가려면 이런 상황을 견디고 배움을 획득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고통만큼 성숙하진 않지만 고통없인 성숙할 수 없다.
얼마 전 본 영상에서 한 성직자는 삶에 있어 고통과 성숙의 관계를 위와 같이 정의했다. 이 말은 직장 생활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직장 생활에서 고통의 순간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 부당한 지시, 근거 없는 모함, 일방적인 견제, 감정적인 보복, 의도적인 배제 등 직장 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괴롭힘은 끝이 없고 연차가 쌓일수록 그 빈도와 정도가 심해진다.
직장 생활 특유의 부당함과 불의함은 사람을 지치고 탁하게 만든다. 호방하고 담대하던 사람도 주눅이 들고, 맑고 밝던 사람도 빛을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직장 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것은 고통 뒤에 성숙이 잇따르기 때문이다.
인생의 모든 면에는 명과 암이 존재한다.
직장 생활도 그러하다.
그러나 암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은
명을 마주할 수 기회를 가질 수 없다.
고통스러운 순간을 견뎌내고 그 안에서 성숙의 실마리를 발견할 때 우리는 직장 생활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 특히 리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암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이겨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암을 바라본다고 이에 물들지는 않았으면 한다. 불의함에 타협하거나 부당함에 동조하는 일은 순간은 좋을 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암을 바로 보되 이를 타개하거나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충분히 고민하고 그 해답을 내 안에서 찾아내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직장 생활에서 성숙을 이룰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기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