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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수집가 Feb 09. 2022

초대한 적 없는 손님

두통이라는 거짓말 같은 고달픔

이번 달에도 어김없이 그가 나를 찾아왔다

 

'오늘이군.'


하루의 피곤함이 몰리며 퇴근이 간절해지는 오후 4시 50분쯤, 다소 늦은 그의 방문을 나는 순순히 받아들인다. 달력을 가볍게 체크한다.


물론 그의 방문은 언제나 그러하였듯 여전히 매우 극적이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주변에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올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우다 오지 않기도 하고, 어느 날은 바쁜 일상 가운데 놀랄 만큼 갑작스럽게 들이닥쳐 말문을 막히게도 하다가, 어느 날은 흡사 아닌 척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영문을 모르게 하고는 뒤늦게야 복면을 벗으며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오늘은 오전 내내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인기척을 내다 퇴근 무렵 기어코 바쁜 갈길을 가로막는다.


그의 방문은 단 한번도 쉽지 않았지만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그를 내 삶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방문을 막을 적절한 방법도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래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라면 참고 만나줄 만한 수준이라고 체념한다. 한 달, 30일, 그중에 하루나 이틀, 그뿐이라면 괜찮지 않냐고 씁쓸히 위안한다. 나에게 한 달이라는 시간의 개념은 그의 방문이 있었냐는 셈법으로 계산되곤 한다. 그가 왔다 가면 이제 한 달의 시간은 다시 셈에 들어간다. 그가 왔다 간 날의 최대 위안은 이제 적어도 앞으로 얼마 간은 그를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그것이다.


그는 내 삶에서 어떤 영향력을 지니는가


일단 그가 찾아오는 날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아니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무력함의 극단에 이른다. 그가 방문한 날은 주변 동료들에게 조용히 그의 예견된 방문을 알리고 정중히 양해를 구한다.

그날의 나는 말수가 줄어들고, 우울한 표정일 수 있고, 식사량이 급격히 줄거나, 눈을 자주 감은 채 생각에 잠길 수 있고, 어떤 즐거운 대화에도 잘 참여하지 않으며, 행동반경이 매우 좁아져 앉은자리를 잘 벗어나려 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오늘 하루는 정상적인 모습일 수 없고, 내가 나로서 기능할 수 없는 날이기에 이를 주변에 알려 그들의 애정 어린 무관심을 구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의 등장은 도대체 어떠한가


어느 날은 무례하게도 오른쪽 뒷머리를 강하게 여덟 번씩 치며 요란하게 등장하고, 나는 미처 손쓸 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압도되며 단번에 제압당한다. 그때 나는 묵비권만을 행사할 수 있다. 주변인들은 미처 알아채지도 못하는 조용하고 우아한 등장이지만 나의 온몸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전쟁터에서 뜨거운 연기만 자욱한 전후 폐허가 되어 버린다.


또 한 번은 귓속에 바싹 다가와 종을 댕, 댕, 댕, 울려대며 나타나 말문이 칵 막히도록 하얗게 질려버리기도 했다. 그런 날은 어떤 불행한 표정을 지을 수도 없고 원망의 한마디 말조차 입을 떼기 힘들다. 그날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표정과 말과 감각도 사치가 된다.


어느 날은 아침부터 찾아온 그를 맞대응할 의지조차 가질 수 없어 두 손을 싹싹 빌며 뭘 잘못했는지도 모를 용서를 빌기도 했으며, 또 어느 날은 앉으나 서나 누우나 걸으나 내게 딱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조차 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그날 하루의 모든 일정을 취소해 버리기도 한다. 어마어마한 공포감에 매몰되어 불만조차 가질 수 없었다.


이는 좋고 나쁨의 윤리적 판단 대상이 아니며, 허용과 거부라는 선택의 대상도 아니다. 삶에서의 존재감으로 치자면 언제든지 원한다면 얼마든지 나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갈 수 있는 어마어마한 지분을 차지하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악마의 축제가 끝나고 난 후 내 몸은 마치 화려하고 거대한 불꽃놀이가 종료되고 남은 쓸쓸한 현장과도 같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빈 땅을 잠식하고 멍멍해진 귓속을 부여잡듯 한동안 얼이 빠져있게 된다. 철저한 그리고 처절한 주종 관계다.


어쩌면 나에게도 문제는 있다


일단 그가 가고 나면 존재감을 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가 등장하지 않는 날은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평온할 뿐이다. 오히려 그가 오지 않는 평화로운 날 오지 않는 그를 생각한다는 것이 내겐 더 폭력적인 일일 수 있다. 한 달 중 그로 인해 괴로운 하루 이틀보다는 그가 오지 않는 나머지 29일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살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은 산술적으로만 가능한 멍청한 계산임을 안다. 한 달에 하루 꼴로 찾아오던 그의 방문이 시간이 흐를수록 그 횟수와 강도가 점점 잦아지고 강고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치한 염증은 제멋대로 변이한다. 지난달로 치자면 벌써 세 번 그를 만났다. 한 달에 한 번이면 됐지 하던 산수는 의미가 없어지고 나는 이제야 왜 이 방문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무의미한 질문을 수도 없이 던져보곤 한다.


그저 이 두통은, 통증이라기보다 내게 두려움이고 갑질 그 자체다.
감히 맞설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일방적 폭력이다.


단 하나의 해법은 약물이었다


나만을 위해 조제된 약들이 있다. 몇 년 전 통증을 참다못해 찾은 전문의로부터 섬세한 진찰을 받고 다양한 고려 속에서 처방된 약, 어쩌면 내게 이 약이 있기에 두통은 그렇게 그럭저럭 버터내고 있는 두려움이 아닌가 싶다. 벌써 수 년째 어딜 가든 분신처럼 넣고 다니는, 네모나게 투명한 봉지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익숙한 몽타주의 처방약. 반으로 쪼개진 흰 알약을 보고 있다 보면 어두운 밤하늘을 제법 밝게 비추는 차지 않은 반달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정겹기까지 하다.


이제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이 약을 처방해 준 전문의는 수많은 통증 환자들을 매일 만나는 분이다. 그에게 내 두통은 어떤 감각으로 짐작될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를 하다 보면 나처럼 어떤 통증을 어제나 엊그제쯤 진절머리 나게 떠나보내고 오늘은 비교적 무심한 표정으로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에서부터, 어디서 비롯되는지 관찰하기 어려운 그러나 그 고통만큼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 엄청난 통증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심각한 환자들까지 다양하기 때문이다.


수시로 위급함의 색깔이 달라지는 병원에서 그저 그런 통증환자 정도로 취급받는 건 아무래도 조금 서운하다. 두통은 사실 겉으로 아픔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보니 타인은 그 정도를 가늠하기 어렵고 때로 꾀병이나 거짓말 같이 보이는 고달픈 통증이다. 어느덧 수 년째 같은, 때론 조금 진일보한 증상을 호소하며, 비슷한 주기로 찾아오는 나에게 그 전문의는 조언했다.


"힘드시죠. 만성화되었네요.

앞으로  더 심해질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럼 약을 바꿔 보면 돼요.

두통약은 정말 많거든요. 

나에게 맞는 약을 하나하나 찾아가다 보면 어느새 통증과 함께 살아가는 것처럼 될 거예요.

만성 두통은 치료라는 개념이 없어요.

약으로 달래야 하죠.

믿기 힘드시겠지만 이 정도 약으로 조절된다면 그래도 괜찮은 편입니다.

그리고, 어쨌든 잘 맞는 약이 있다니 괜찮은 것 아닐까요? "


어느새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는, 그런 여유로운 통증 환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 날이면 두통에 대한 두려움은 그럭저럭 가라앉아 있다. 달이 차고 기우는 것처럼 내 통증도 차고 기울 때가 있다. 그럴 때 그 차지 않은 반달 같은 약 몇 알이면 이 두려움은 곧 '방법이 있어 그래도 괜찮은 문제'가 될 뿐이라는 생각이다.


약에 의존하지 않고 있지만, 더욱더 의존하지 않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 근육과 자세 치료도 병행하게 되었다.


이번 달은 또 몇 번이나 반달을 삼켜야 하나, 헛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보름달이 아닌 반달은 삼키기에 나쁘지 않은 크기라고 생각해 버리기로 한다.



*매거진의 취지에 따라 지난 글들을 퇴고하여 본 매거진에 수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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