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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수집가 Mar 30. 2022

인연, 빅뱅, 소멸, 물질

공간을 존재로 받아들이는 담담한 우주처럼


1. 공간

우주가 탄생하기 전 공간은 없었다. 우주라는 탄생으로 비로소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라는 존재가 생겨났다. 너로 인해 나는 공간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공간을 존재로 받아들이는 담담한 우주처럼.




2. 시간

우주는 점에서 시작하여 팽창해 왔다.

돌이켜 보면 너와 나라는 존재도 티끌 같던 한 점에서 시작되었고 걷잡을 수 없이 팽창했다.

그것은 블랙홀이나 빅뱅 같은 예상치 못한 특이점이었는지 모른다.

50억년을 지나온 태양은 이제 소멸을 준비한다. 태양의 소멸은 수성과 금성을 삼키는 일이다. 우리의 소멸은 함께했던 공간과 시간을 삼키는 일이다. 소멸이란 모든 존재의 숙명이기에 너와의 결말은 낮은 곳에 고여 있는 한 움큼 샘물처럼 그래서 당연하고 그래서 침착하다.




3. 사람

우주 상수를 억지로 집어넣어 우주의 팽창을 막아 보려 했던 어느 과학자의 패기처럼 나는 모든 섭리를 내세운 굳건한 벽으로 너와의 팽창을 막아보려 했었다. 그러나 너와의 시간과 공간을 조금이라도 거두어 들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우주의 시작과 끝에 옳고 그름이 없듯이. 하지만 과학자의 우주 상수를 남몰래 허리 뒤로 감춘 것은 결국 나였다. 그 계산식에 우주 상수를 집어넣을 수가 없던 나는 비겁했다. 내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후회는 그것뿐이다. 내 손에 우주의 팽창을 막을 수 있던 그 마지막 상수가 존재했음에도, 팽창도 소멸도 막지 못했음을.




4. 물질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들의 충고를 외면한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었다. 나의 남은 마음은 짜고 무른 소금처럼 혐오스레 굳어가다가 이제 납처럼 무거워져 내 가장 낮은 밑바닥에 침전한다. 너와 나는 공간과 시간과 물질을 합한 것과 같았어도 뒤를 돌아보는 마음은 언제나 유독하다. 소금 기둥이라는 형벌은 그래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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