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는 대전의 한 외곽 중심지이다. '외곽'과 '중심지'라는 말이 상반되어 보이지만 이곳을 안다면 정말 그 말이 딱 들어맞는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둔산동이라고, 대치동에 많이 비유되는 학원가도 많고 명문 초중고도 많은 북적대는 그곳이 그렇게 아이 키우기가 좋다고들 주변에서 강력 추천했지만 나는 평소의 성향대로 적당히 중심에 속하면서 적당히 소외된 이곳을 찾아 5년 전 두 번째 내 집을 마련했다.
그런 동네에는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것일까?
이곳에는 작지만 강한 가게들이 참 많다.
오늘 내가 찾은 한 카페는 얼마 전 아파트 단지 옆 상가 틈에 낀 작은 가게에서 50여 미터를 전진하여 대로변으로 확장 이전 진출한 곳이다. 티비에도 여러 번 나온 유명 바리스타가 운영하시는 작지만 작은 카페의 성장이었다.
그리고 확장 이전 기념으로 신규 블렌딩 했다는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시게 되었다.
미리 말하자면,
나는 커피 애호가이긴 하지만 부드러운 라떼를 선호한다.
하루 한 잔은 꼭 커피를 마시지만 커피 맛을 섬세히 구분하지는 못한다.
커피의 산미를 즐기라고 하지만 신맛이 진하게 느껴지는 원두는 사절이다.
어쩌면 커피 그 자체보다도 커피와 함께 떠오르는 그 이상의 것들, 사람, 풍경, 향기, 공간, 여유, 고요함 같은 것들을 더 좋아한다.
그런 나에게 이 아메리카노는 눈이 크게 떠질 만큼 강한 만족감을 주었다.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진한 바디감이 일단 묵직했다.
그리고 한 모금을 넘기자 꽃잎을 한 잎 잘게 깨문 듯한 산미, 혹은 얇디얇게 썬 과일 한 조각을 머금고 커피를 마시는 듯한 상큼함이 뒤따라온다. 곧이어 향기가 코끝에 한참을 머문다.
적당히 따끈한 온도,
입에 닿는 두터운 머그잔의 두께까지도 조화로웠다.
그리고 순간 고개를 끄덕였고, '와, 좀 행복한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실 이런 종류의 질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평소 이런 질문에 답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재치도 없을뿐더러 딱히 답이 없을 것 같은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나의 사유와 경험과 재치의 깊이를 시험대에 올려놓은 기분이 든다. 간신히 떠올린 생각을 그대로 말하기도 주저스럽거니와 몇 초 고민한다고 해서 더 나은 대답이 나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질문을 던져 본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행복의 모습은 서로 비슷하게 닮아 있는 듯하니까 우리는 사실 행복이 무엇인지 설명할 순 없어도 같은 것을 떠올릴 것이다.
정말이지, '행복'이란 무엇일까. (*여기서부터는 전공자의 고질병이 나온다. 패스하셔도 됩니다.)
'행복'은 추상 명사다. 추상 명사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나무' 같은 구상 명사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과 방식이 조금 다르다. 먼저 기본적으로 언어의 의미란 그 언어가 가리키는 대상(지시물)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산, 바다, 하늘, 별, 구름' 등의 단어는 각각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있으며 그것이 곧 그것들의 의미라는 것이다. 이를 1) 지시설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 사랑, 축복, 민주주의' 같은 단어들에는 지시물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단어들의 의미는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 것일까?
탁월한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는 '의미'를 언어 자체의 내부 현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을 이어받은 오그덴&리처드(1923)는 의미의 문제가 언어 내적인 문제임을 반영하면서도 언어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 사이의 관련성을 제대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2) 개념설이다. 내용은 다소 복잡하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지시물이 직접 기호화되는 것이 아니라 개념화되는 사고 과정을 거쳐서 나온 것이 곧 의미'라는 것이다. 골치 아픈 '의미의 의미'이다.
<오그덴&리처드(1923)_의미의 기호 삼각형>
결론만 말하자면 오그덴&리처드의 의미의 기호 삼각형을 활용하면 우리는 딱히 지시물이 존재하지 않는 행복과 같은 추상 명사의 의미를 '개념'을 통해 파악한다. 하, 쉽지가 않다. 일반적으로 '의미'와 '개념'을 동의어 정도로 파악하는 언어적 직관을 지니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말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느껴질 것 같다. 단어가 지시물과 바로 연결되는 '나무'같은 단어와 다르게 개념을 통해 연결된다는 것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행복'의 의미를 알기 위해 국어사전에서 '행복'의 개념 정의를 참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사전에서 찾아본 '행복'의 의미>
돌고 돌아왔지만 사전이 알려주는 행복의 의미는 예상외로 싱겁기만 하다.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사건이나 믿을 수 없이 비현실적인 그 무언가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한 마음의 상태가 곧 행복이라니. 틸틸과 미틸이 결국 자신들의 새장 안에서 찾았던 파랑새처럼, 사전이 알려주는 행복의 의미가 오늘 내가 느낀 그 행복감과 너무도 닮아 있어 사전을 찾아본 뻘쭘함이 조금은 상쇄된다. 정확하게, 행복은 순간의 만족감이다.
3. 행복이란, 꿀꽈배기 과자처럼
동네 바리스타의 깊은 내공이 느껴지는 아메리카노의 맛에 취해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꿀꽈배기 과자를 뜯었다. 두 손가락에 집힌 아무 거나 하나를 입에 물었는데, 세상에나, 진득한 꿀이(사실 설탕물이) 과자 전체에 달라붙어 있는 찐 꿀꽈배기였다. 진득진득하고 쫀득한 식감이 아메리카노는 주지 못한 또 다른 크나큰 만족감을 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또다시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알고 있다.
이 과자 한 봉지 안에는 그처럼 진짜 단맛으로 범벅이 된 꿀꽈배기와, 그냥 꽈배기가 공존한다는 것을.
그다음에 집어 먹을 꿀꽈배기는 어쩌면 그냥 튀겨 나온 심심한 맛의 꽈배기일 것임을.
아니 꿀꽈배기보다는 꽈배기가 더 많다는 것을.
그런데 괜찮지 않은가?
행복은 꿀꽈배기 과자 봉지 안의 진짜 꿀꽈배기를 건져 먹을 때의 만족감 정도면 된다는 마음 말이다. 진짜 꿀꽈배기 과자가 얻어걸렸을 때의 흐뭇함 정도면 된다는 너그러움 말이다.
말도 많은 스타벅스가 아니래도
동네 터줏대감 카페 주인이 내려주는 커피 한 모금을 넘기는 순간이 더해지고,
우연히 얻어걸린 꿀범벅 꿀꽈배기를 오물조물 깨무는 순간이 더해지고,
아무런 언쟁도 시비도 없이 조용히 자정을 맞이하는 어떤 외롭고도 깊은 밤의 시간이 더해져서
그렇게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된다.
비록 내일 아침이면 다시
아픈 어깨 때문에 재활의학과를 방문해야 하고,
평생의 숙제 다이어트로 인한 식단과의 전쟁이 이어지며,
막 사춘기를 맞이하려 하는 아이와의 미묘한 신경전이 예상되더라도,
일상과는 별개로 꺼내 놓을 수 없는 내면의 상처들은 또 말해 무엇하겠나 싶더라도,
그렇게 우리는 '순간의 행복'을 더해 '행복의 순간'을 맞는 사람이 된다.
happiness(행복)와 happening(우연한 사건)의 어원인 ‘hap-’은 ‘우연’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happiness라는 말에는 우리의 철저한 계획이나 통제와 조절로 인한 성과 그 이전에 우연히 발견하는 순간의 마음가짐이 곧 행복이라는 울림이 들어 있는 것만 같다. 이제 '행복'해질 준비는 좀 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