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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야 Aug 03. 2022

내일이면 집회가 열린다.

 어쩌면 2018년도 출생 아이부터 해당될지 모르는 만 5세 초등학교 1학년 입학을 골자로 한 학제개편안에 관한 반대 여론이 뜨겁다. 우리 지역의 학회와 각종 연합회들에서도 내일 있을 집회 인원을 파악하기 위한 조사를 시작했다. 집회의 주요 골자는 현행대로 만 5세 아이들의 유아기 교육경험을 보장하게 하는 것이다. 유아교육을 공부하고, 유아교육현장에 몸 담고 있는 자로서, '만 5세의 초등학교 1학년 입학'에 대한 정책적 논의는 아이의 입장에서 당연 불행한 일이다. 나 역시 어린이의 입장에서 반대한다.

 정책이 나온 후부터 매일 반대 집회가 있어왔지만 내일이면 대규모 집회가 열린다. 사실 어린이의 행복과 권리를 앞에 내세우고 있지만 '유아교육'을 둘러싼 수많은 이해관계 집단들의 이익 또한 이와 관련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 5세의 1학년 입학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대를 하게 되는 이유는 아이들의 삶이 더욱 불행해질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1학년의 학부모가 되니 아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아이의 속도보다 학급의 속도가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만 5세에 입학하게 된다면 아이들은 더 일찍부터 학업의 목표에 익숙해져야 하고, 사회에 적응되어야만 한다.

 한나 아렌트는 학교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중간 즈음에 있어서 아이들이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이동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 시대의 학교는 점점 더 공적 영역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 같다. 사적 영역에서 행할 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들, 개인적인 영역의 다양한 사건들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삭제되어 버리고, 공적 영역에서 행해지는 문서화되는 것들만 주로 남는다. 그래서 사적 영역에 훨씬 익숙한 이른 시기의 학교 입학은 아이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  

 만 5세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될 수 있다는 가정이 참담하게 느껴지는 것은 현 정부가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 정책에는 어린이를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떠받칠 도구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정부의 시선이 있다. 하고픈 말은 '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 어린이는 제외되고 경제만 있었다'는 것이다.

 교육은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언제 교육효과가 나타날지 모르는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교육자는 효율성이 강조되는 요즘 사회에서 직업에 만족을 가지고 살기가 힘들다. 내가 생각하기에, 요즘 시대의 참된 교육자는 낭만주의자들이 아닐까 싶다. 그런 낭만적 기대라도 없다면, 투자와 수익이라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세상 앞에서 어린이의 목소리를 대변하기가 어렵다. 어린이의 삶에 함께 머무르는 자가 어린이의 삶을 공감하고 그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다면 이것은 어린이와 교사, 부모 모두에게 불행이다.

 제임스페크먼은 종단연구를 통해 유아기의 투자 효과에 대해 입증해 낸 학자이다. 교육부 장관이 언급한 16배의 투자효과의 근거 이론이 이렇게 사용되는 것을 알면 이 학자는 어떤 느낌일까? 이 연구는 유아교육에 대한 인식이 열악하던 시기,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연구로 유명하다. 실제로 신자유주의 국가들에서 효율성의 가치를 기조로 유아기 교육에 대한 투자를 이끌어 내 왔다. 그러나 현 정부가 말하는 '투자' 개념의 뒤에는 저출산으로 인한 실제 일할 수 있는 산업인력을 조기에 배출해내겠다는 큰 그림이 먼저 자리해있다. 유아교육의 방식이 '적기' 교육, '통합'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부정하고, 어린이의 시기를 짧게 생략하여 빨리 투입하여 빨리 산업 일꾼으로 뽑아내겠다는 단순한 원리 앞에서 교육에 몸담고 있는 자들이 중요시해온 수많은 가치들은 그대로 삭제된다. 이것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유아교육을 위해 노력해온 수많은 어른들을 향한 폭력이기도 한다.

 성인에게는 어린이를 보호해야 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윤리가 작동하고 있다. 어린이가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표현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1학년에 입학한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에게 학교의 적응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아이를 키워본 부모라면 안다. 어린이들은 그 부적응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표현하고 있다.

 사회가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더 따스하고 너그러워진다면, 정책을 결정하는 자들이 어린이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정책을 이렇게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내세우는 잘못을 덜 저지르지 않을까? 노키즈존이나 어린이를 바라보는 냉소적인 시선들, 어린이를 키우는 엄마를 향한 혐오 단어 등 우리 사회의 시선이 이번 정책을 통해 더 차갑게 와닿는 것만 같아서 답답하고 참담한 마음이다.

 

내일이면 대규모 집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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