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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야 Sep 01. 2022

늘 져주는 아빠

손바닥 위에 있는 자는 누구?

결혼 전, 나의 술친구는 부모님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일과를 마치고 뒷고기집에서 만나 몸에 알콜을 충분히 섞은 후, 노래방에 가기도, 2차로 '한잔 더~!'를 외치동네를 누볐다. 건배사를 돌아가면서 하고 마지막 남은 소주를 세개의 잔에 공평하게 나눠 마시며 계산서와 카드를 내미는 이에게는 두 팔 벌려 박수를!!

대학시절부터 결혼 직전까지 이어진 우리의 술자리 역사는 9년, 취업준비부터 사회 초년생인 내 이야기에 함께 웃고 그 이야기에 취해 나만 울던 따스하고 재미진 기억들은 삶의 보물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우리 세 사람이 함께 술잔을 기울일 일은 사라졌지만 '생생한 간(肝)의 황금기'를 부모님과 함께 지낸 기억은 여전히 각인되어있다. 


결혼 후, 신랑에게 '아빠만큼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다~'하고 말할 정도로 기억 속 아빠는 "늘~!" 내 편이었다. 그러던 아빠는 내가 아이를 낳고 키우며 조금씩 변했다. 아빠의 사랑이 내 아이들에게로 옮겨간 것이다!

아빠는 내게 때로 갑자기 짜증을 내기도, 화가 난 표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런 아빠의 모습이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아빠가 나를 '다 자란 사람'으로 인식했음으로 느끼기도 한다. 아빠는 '어린 자들'을 향해서는 화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의 진단처럼 내 성격은 아빠를 꼭 닮았다. 우리 부녀에게는 풍요로운 감정이 있다. 삶의 크고 작은 것에서 자주 감사하고 기쁨을 발견하는 반면, 작은 일에 쪼잔하게 감정을 내세울 때도 있다. 그나마 아빠와 게 다행인 것은 부정적인 감정을 오래 머무르게 하는 능력이 다소 부족하다는 점이다.


엄마, 아빠와 거의 매일 통화를 한다. 사건의 아침에는 아빠랑 통화를 하지 않아서 밤 9시가 되어 산책 나간 길에 전화를 걸었다. 친구분들을 만나 그 시간까지 귀가하지 않았던 아빠는 전화를 받자마자,

"간다. 간다. 이제 나왔다."하며 짜증을 냈다. 

"하..... 아빠! 지금 시간까지,,  저녁은?"

"가고있다!"

아빠는 갑자기 전화를 툭 끊었다. 내 말을 잔소리라 생각하고 듣기 싫었던 것이다!! 


'방금, 아빠 맞았어?' 황당하고 믿을 수 없었다.

분명 통화품질의 문제일 것이다. 다시 전화를 건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오니-"

아빠가 그냥 끊었다.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났다.

나도 갑자기 욱하는 마음이 올라와서 귀에 익숙한 여자목소리를 딱 끊어버렸다.

'흥!!!!!!!!!!!!!!!!'


아빠는 딸을 향한 미안함과 멋쩍음으로 1시간 안에 전화를 걸 것 이다. 그 전화를 기다릴지, 다른 통화 상대를 찾을지 고민한다. 지난 번 걸려온 전화를 받지 못했던 친구 생각이 났다(부재중 전화는 늘 숙제처럼 남는다).

 '아빠도 잠시 마음 불편해보라지!'

통화연결이 안되면 마음이 불편할 것을 알면서도 아직 고요해지지 않은 나는 친구와의 통화를 감행한다. 통화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통화 후 확인한 문자함에는 아빠의 [콜키퍼-통화중]이 적힌 2개의 문자가 있다. 이건 아빠의 사과신호다.

'그럼 그렇지ㅎㅎㅎㅎㅎ'

예상대로 온 연락에 안심이 된다.

'내일되면 놀려야지~!' 사건을 박제하여 보관한다.


다른 사람과의 갈등은 회피하거나 끝까지 내지르지 못하는 내가 아빠와의 갈등에서는 나를 그대로 내보인다. 유일하게 아빠만이 내 예상 안에서 움직여주기 때문이다.

예민하고 겁 많으며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인 내가 사회에서 그나마 기를 펴고 살고 있는 건, 모두 아빠의 공헌 덕분이다. 아빠는 큰 그림을 그렸던걸까? 손바닥 위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 은 내 손이라 믿고 싶다.


P.S. 신혼때 신랑에게

 "아빠가 (나를) 사랑해주는 만큼 사랑받고싶다 ~"했더니 신랑은

 "나는 아빠 ~~데~, 나도 우리 엄마만큼 사랑해주면 좋겠다~"하고 농담처럼 돌려줬다. 대사의 맞바꿈은 놀람과 이입을 불러왔다.  잠시만 생각해도 어머님만큼 신랑을 사랑하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개같이 짧은 순간에 '세상에서 아빠보다 나를 더 사랑해줄 남자는 없구나~!'를 깨닫고 한동안 슬펐다.


시간이 지나고 아이를 키우면서 배우자와 부모-자식간사랑은 결이 다르다는 걸 느낀다. 사랑의 색은 정말 다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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