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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야 Mar 08. 2024

아이 곁이 필수인 날, 함께 있을 수 있는 안도

육휴 느끼기 1) 병원 방문일에 눈치 볼 필요가 없다

휴직한 좋은 점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점이다(아이들과 함께할 때만 모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지만 사실 그 이상을 바라지도 않는다). 작년 여름에 눈 수술을 한 첫째의 검진일이다. 휴직의 이점이 바로 느껴진다. 작년수술 전 검사와 수술 후 검사 일정을 직장에 얘기하기까지 엄청 눈치를 봤던 기억 때문이다. 공무원은 가족 돌봄 휴가가 보장되지만 법으로 보장되는 것과 분위기로 보장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수업일에 하루 빠져야 한다는 얘기를 꺼내기까지는 관리자의 기분, 교육청 순회교사의 보결 수업 가능여부 등 여러모로 신경쓰이는 일이 많다. 아이의 병원 일로 출근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옅긴 했지만 관리자의 불편한 감정들을 눈치챘던 기억이 난다. '이러니 저출생이 해결 안 되지' 생각했다. 

 

홀가분한 기분에서 휴직했음이 느껴진다. 일할 때는 쓸 수 없던 보호자 동행학습을 학교에 신청했다. 진료 후 동생네에서 이틀 머물다가 오는 일정을 계획했다. 조카까지 더하면 줄줄이 연년생이 완성될 세 녀석들의 노는 모습이 안 봐도 훤하다. 이미 우리 집에 기린 둘, 동생집에 기린 하나가 목 빠지게 오늘만을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에 실린 즐거움의 기대치들이 높다.


나와 두 아이가 함께 srt를 탔다. 세 자리라 애매해서 특실을 예매했다. 대구에서 수서까지 1시간 40분 동안 가능한 조용히 가는 것이 목표다. 닌텐도를 챙겨 왔지만 될 수 있으면 꺼내지 않으리라!

 다짐과 상관없이 두 아이는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심심하다는 말을 쏟아낸다. 게임기를 내놔라는 뜻이다. 나는 '심심한 것도 좋은 거니 견뎌봐'하고 말하지만 닌텐도 외에 그리기 도구 같은 것을 아무것도 챙겨 오지 못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뭘 먹으면 시간이 갈까 싶어 특실에 제공되는 초콜릿쿠키와 견과류를 뜯는다. 그러나 아이가 자란 만큼 먹는 속도도 빨라진 건지 시간 때우기의 의미가 없다. 창 밖을 구경해 보자는 말도 터널을 지나며 무색해진다. 두 아이 모두 조용하려 노력했는데 어린이의 톤은 높다 보니 말 몇 마디에도 주위에 방해가 될까 과하게 눈치 보인다.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어린이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 요즘은 작은 것 하나도 신경이 쓰인다. 뭔가 부산스러워지기 전에 과자가 담긴 상자를 보다가 각자 동물 한 마리씩 만들기를 제안했다. 풀, 가위, 색연필 없이 오로지 상자와 손가락으로 만드는 과제가 생겼다(때로 단순한 과제가 시간 보내기에 도움이 된다). 나는 당연히 평면만 생각했는데 둘 다 입체로 완성하는 모습이 신기하다.

열차에서 내려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왔는데도 병원에 너무 일찍 도착했다.

"오빠야, 우리 게임하자."

"야~ 안과에서 어떻게 게임을 해?"

"아, 맞네. 의사 선생님한테 혼나겠지?"

스스로 게임을 포기한 아이들에게 느낀 대견함과 별개로 기다림의 시간은 너무 길었다. 심심함에 지친 둘째는 어디 유튜브에서 봤다며 손을 합장하고 '나는 관대하다. 나는 관대하다. X100'를 주문처럼 외우는데 나는 왠지 너무 부끄러웠다. 제발 그만하라며 엄마도 똑같이 하면 괜찮겠냐며 아이를 흉내 내는데 마음과 달리 "나는... 나는 관.."까지는 돼도 완성형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온종일을 보내며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들에는 어느새 자라 깊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감동도 있지만 아직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행동들에 대한 숨기고 싶은 것들도 뒤섞여있다. 등교하고 학원에 갔다면 몰랐을 오늘의 이야기들이 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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