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출근, 슈퍼우먼이 되어가는 과정
2021년 7월 13일, 10년 공백을 깬 첫 출근날이다.
보통은 오전에 일어나서 바로 샤워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 날은 했다. 학교와 어린이집에 가야 할 두 아이를 씻기고, 먹이는 데에만 집중하느라 그동안은 세수와 양치만 하고 집 밖을 나서곤 했지만 이제부터는 그럴 수 없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부터라도 사무실에서 일 좀 해 본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7월 중순임에도 더운 공기가 마스크 속 얼굴을 송글송글 적시던 때였다. 그 불쾌감은 이제 내가 고려할 대상이 못됐다. 안 하던 풀메이크업을 했다. 그동안 뷰티 유튜브 열혈 시청자로 살아온 시간들이 빛을 발할 타이밍이 온 것이다.
그동안 자격증 공부를 하느라 미용실을 안 갔기 때문에 머리를 자를 틈이 없었다. 그래서 의도하진 않았지만 헤어스타일도 긴 생머리로 나름 사회생활하던 사람마냥 봐줄만했다. 헤어롤로 정성껏 드라이를 하고 머리를 풀어헤치니, 후줄근한 아줌마의 분위기는 좀 가려진 것 같기도 하고.
아이 둘 등원 준비로 빠듯하기만 했던 시간에 샤워를 하고, 풀메이크업을 하고, 드라이를 하다니. 그렇게 없던 시간들은 대체 어디서 난 건지. 얇은 여름 니트와 H라인 치마를 단정히 차려입고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내가 알던 내 모습이 좀 낯설게 느껴졌다.
그동안 내가 어렴풋이 그리던 커리어우먼이란, 깔끔한 인상에 긴 생머리를 하고, 블라우스와 H라인 스커트를 입은 모습이었는데 그런 모습으로 내가 정류장 앞에 서있다.
회사에 도착하니, 나보다 나이가 10살에서 5살 정도 적은 프로그래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남자였다. 이사도 대표도 남자였다. 여직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무실을 한 번 둘러보고 '과연 내가 이곳에서 적응할 수 있을까?'싶은 생각이 스쳤지만 그건 시간에 맡기기로 했다.
자리에 앉아 기다리니 수석 프로그래머('수석님'으로 통칭)라는 사람이 다가왔다. 원래는 제품 프로그래밍에 전념해야 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스타트업 회사인 관계로 프로그래밍 외에도 제품 배송, 물류 조달, 거래처 관리 등을 혼자 다 떠안고 있던 상황이라고 했다. 그래서 앞으로 나는 수석님을 도와서 제품 배송, 물류 스케줄 조정, 거래처 관리를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엑셀이 필수다. '컴활1급 보유자'라는 자부심은 갑자기 알게 된 업무에 대한 충격에서 약간의 방패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 방패는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깨지고 말았다. 나는 곧바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회사 사람들은 모두 구글 스프레드시트로 모든 자료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편집을 하고 있던 것이다. 내가 알던 엑셀이 아니었다.
나를 더 당황시킨 것은 따로 있었다.
"이건 한 번 수정할 때마다 바로바로 저장이 되니까 신중하게 작업해야 돼요"
수석님의 한마디는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구글 스프레드 시트는 수정하는 대로 정보가 바로바로 저장이 되기 때문에 나 같은 신입 초짜가 자료 하나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모든 자료가 다 뒤엉킬 수 있다. 신입에게 이만큼 무서운 일이 또 있을까? 엑셀은 저장할 타이밍을 내가 결정할 수 있지만 구글 스프레드는 아니다.
이제 와서 못 하겠다고 발을 뺄 것인가. 나이를 먹어가며 뻔뻔함만 늘었는지 실수를 하더라도 일단은 감당해보자는 배짱이 나를 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게 만들었다. 더 물러설 곳은 없다. 나를 오라고 하는 곳이 있다면 일단 거기서 쫓아내기 전까지는 있어볼 수밖에 없다.
다행인 것은, 회사와 약속한 근로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였다. 하루에 4시간씩만 버티면 어떻게든 근로 일수는 쌓일 것이다.
회사는 나를 얼어붙은 채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구글 스프레드에 대한 1차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출근 직후부터 수석님은 나에게 회사의 주요 판매처와 제품 특징을 설명했다. 듣자 하니, 국내에는 아직 판로가 없고, 해외의 일부 웹사이트를 통해서만 판매되고 있었다.
자, 생존을 위해 뇌를 풀가동할 때가 왔다. 우리말로 들어도 어려운 인수인계를, 첫날부터 해외 판매 사이트 기준으로, 해외 거래조건 기준으로 모든 새로운 용어를(심지어 영어로) 내 머릿속에 빠르게 입력해야만 이 회사에서의 내일이 보장된다. 다행히 나에겐 초초초! 빠른 필기 기술이 있다.
얼른 노트를 펴서 수석님이 하는 모든 말을 정신없이 다 받아 적었다. 수석님은 미친듯한 내 손놀림을 보고 살짝 말의 속도를 줄여주는 센스를 발휘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첫날 출근해서 파악한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 회사에서 판매하는 제품에는 2가지 색상 옵션이 있고, 옵션에 따라 부가적으로 들어가는 구성품의 색깔이나 재질이 달라질 수 있다.
2. 옵션과 구성품을 조합해보면 총 6가지의 경우의 수가 존재하는데, 각기 다른 옵션과 구성품을 식별할 수 있는 알파벳을 한 개씩 부여하여 조합한 뒤 구글 스프레드 시트를 이용하여 상품코드(SKU)를 생성해야 한다.
즉, 주문번호(Order number)를 제작하는 일이다. 주문번호에는 물류 롯트 넘버, 판매 사이트 코드, 가격 할인 프로모션 코드, 주문자 번호뿐만 아니라 색상 옵션, 구성품 등의 SKU를 포함한 모든 정보가 들어가야 한다.
이를 직관적이고, 논리적이면서, 서로 중복되지 않게 알파벳을 부여하고 조합해서 제작하는 것이 관건이다.
3. 해외 판매 사이트별로 주문자를 파악하고, 주문에 맞는 상품코드에 해당하는 제품을 박스 포장해야 하는데, 이를 상품 포장 업체에 의뢰해야 한다.
포장을 위해서는 엑셀로 SKU별 수량을 산출하여 포장업체에 의뢰하는 단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후에는 해외배송 업체에 주소 및 자료를 전송하여 포장 일정에 맞도록 배송 픽업을 의뢰하는 등 스케줄을 조정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 역량과 컴퓨터 활용 능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4. 배송 신청 후에는 수출 신고를 해야 한다. 수출 신고 시에는 상품명, Shipping fee, 상품 치수, 중량, HScode, 주문번호, 송하인, 수하인, 해외배송 주소, 우편번호, 해외 연락처, 국가별 코드, 상품 가격, 인코텀즈 조건을 파악하여 지정된 양식의 엑셀 시트로 만들어서 해외배송 사이트에 업로드를 해야 한다.
5. 포장된 상품이 픽업되기 전까지 송장과 인보이스를 인쇄하여 준비한다. 포장업체에 제품과 함께 송장과 인보이스를 전달해야 나중에 배송업체가 물류를 픽업할 때 포장 박스마다 배송지 송장이 붙어있게 할 수 있다.
이때 까다로운 부분은, 포장을 의뢰한 SKU별 상품 박스의 개수=인쇄된 송장 개수=전체 엑셀 자료(Raw data)에 기록된 개수가 모두 같은지 확인 작업이 필요하다. 이 수량이 모두 일치해야 배송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후에, 재고 수량을 파악한 뒤 부족분을 생산 공장에 발주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6. 끝이 아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해외 판매 사이트에 댓글로 올라오는 고객들의 피드백에 영문으로 일일이 답신을 주어야 하며, 이메일로도 접수되는 고객 불만사항이나 문의사항에 대해 기술적인 답변을 (물론 영문으로) 해야 하는 것이었다.
입이 떡 벌어지는 회사였다. 이 일을 과연 할 수 있을 것인가?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배달된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옆자리 사원이 도시락을 다 먹고 음식물이 좀 남은 채로 플라스틱 포장용기를 어설프게 들고 탕비실로 가려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마침 나도 다 먹어서 일어나려던 참이라 뭔가 못 미더운 마음으로 사원의 뒤를 따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음식물이 잔뜩 묻은 그 포장용기를 그대로 분리수거통에 집어넣으려는 게 보였다.
"점심 맛있게 드셨어요?^^"
말을 걸어서 주위를 흐트러뜨려 놓은 뒤, 사원이 내게 대답하기 위해 몸을 돌리고 포장용기를 테이블 위로 올려둔 것을 보고 잽싸게 내 것과 함께 집어 들어 싱크대로 가져갔다.
'솨아아아아'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나는 두 개의 포장용기를 대충 헹궈서 음식물을 깨끗이 비워버렸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원의 포장용기와 내 것을 겹쳐 플라스틱 분리수거 통에 자연스럽게 집어넣었다.
"아... 저... 저기 제가 해도 되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사원은 당황한 모습과 동시에 조금 미안한 기색이었다.
집에서 하던 습관이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것이었다. 무례했으려나.
"아, 아니에요 제거 하는김에 같이 한 건데요 뭐^^"
어쩔 수 없는 아줌마의 오지랖. 딱히 숨겨야 한다는 생각은 못해보고 살았지만 이젠 알겠다. 숨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오전 내내 커리어우먼처럼 샤워하고 풀 메이크업하고, 머리를 드라이해서 코스프레했더라도 몸에 밴 습관은 진짜배기 자동 반사다.
어쨌든, 나에게는 분리수거보다 더 중요한, 넘어야 할 큰 산이 있다. 더군다나 다음날은 재택근무란다. 나 때문에(나에게 일을 가르쳐주기 위해) 수석님이 출근할 수는 없단다. 집에서 나 혼자 해야 한다는데 내일이 돼보면 알겠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밥 먹고 1시간이 지나니 벌써 퇴근시간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보러 가야지. 오늘 하루도 잘 버텼다.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