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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udayoo May 06. 2022

생일 주간을 핑계로 여행을 가다

40살 기념 여행 이야기

조금 답답함이 왔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어딘가 멀리, 길게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집순이라 집에만 있어도 심심하지 않은 편이고, 코로나 시국이라 어디를 마음 놓고 다니기도 어려워 꺼린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좋은 핑계가 생겼다. '올해 40살인데! 생일맞이 여행은 가야지!'. 거기다 지금 자체 안식년인데 쉴 수 있을 때 가까운 휴양지라도 다녀와야 하지 않겠나. 한적한 바다가 있는 따뜻하고 조금은 뜨겁기도 한 나라에 가서 늘어지게 누워 생각도 정리하고 머리도 비우고, 계획도 세우고 와야겠다 생각했다. 생각만 해도 좋을 그때(3월 초쯤), 격리가 면제되는 나라 중 하나가 괌이었다. 적당히 걸어가면 바다가 있고, 주변 쇼핑몰에 접근하기도 좋은 위치의 숙소를 먼저 예약했다. 항공권은 타이밍을 보고 조금이라도 가격이 낮아졌을 때 예약하기로 한다.


훌쩍 멀리 외국으로 떠나는 소설 속 여주인공의 감상을 덧입고 창가 자리에 앉아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움직이는 구름을 응시하며 폼을 잡았지만 막상 드는 생각이라고는 기내식 메뉴 A와 B 중 어떤 것을 고를까,였다... (중략)... 식사 시간에는 주변에 죄다 커플이나 어린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중략)... 완전한 혼자가 되고자 이 멀리까지 왔는데 나는 자신과 대화하기는커녕 혼자인 것이 날이 갈수록 비참했다.....(중략)....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려 해도 심오한 사유는커녕 허세와 치기로 이 멀리까지 와서 혼자 커다란 침대를 차지하고 누운 내 모습이 너무 청승맞게 느껴졌다. 내 마음이 내게 말해주는 것은 오로지 '하루빨리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뿐이었다.


결심도 잠시, 임경선 작가의 [태도에 관하여] 책을 막 읽자마자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예약했던 괌의 숙소를 취소했다. 비행기에서 메뉴 고민을 하고 있을 내가 그려졌고, 생각 정리나 사유는커녕 주변에 여행 온 무리들과 함께 한적하지 않은 바다에서 더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 내가 보였다. PCR, 신속항원검사를 한국이나 괌에서 가기 전/후 해야 하고, 혹시나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서 코로나에 걸린다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심오한 사유가 문제가 아니라 청승맞은 40살 생일을 보내게 될 것 같았다.




마음의 환기가 된다


"엄마, 나 제주도에서 며칠 쉬고 오려고."

"혼자 집에서 쉬고 있는데  쉬러 가는 거야?  

". 그렇지만.... 달라!"


결국 말 잘 통하고 익숙하지만 이국적인 '제주'가 생일 주간 여행지로 선택됐다. 저렴한 비행기를 예매하느라 새벽 5시에 집에서 나와야 했다. 아침 7시 비행기를 탄다고 17kg 가득 채운 캐리어와 노트북에 책가방까지 이고 새벽부터 나댔더니 어깨는 짓눌렸고 두통은 깔렸다. 뚜벅이라 6시간 만에 도착한 제주 숙소에 짐을 풀고 근처 카페에 앉아 숨을 돌리는데 그제야  '떠나야 비로소 보인다.'는 말이 맴돈다. 오길 잘했다고. 역시 떠나봐야 한다고. 짓눌린 어깨와 두통이 아랫배에서부터 올라오는 간질거리는 설렘과 들뜸은 이길 수 없었다.  


익숙한 내 집, 내 동네가 아닌 낯선 동네와 공간이 주는 흥분감은 떠나봐야 안다. 독립해서 혼자 24시간 여행하듯 지낼 수 있어도 여행은 아니다. 엄마에게 이제야 다름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첫째, 오늘 뭐 먹을지, 내일 뭐할지 생각하느라 육지에서의 고민을 비우기에 참 좋다.

 둘째, 당장의 오늘을, 지금의 현재를 즐기고 집중하기에는 여행만 한 것이 없다.

 셋째, 분위기와 공기가 너무 다르니 마음의 환기가 된다.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낮술 아니던가

낮술을 좋아한다. 통금이 있던 시절(부모님과 함께 살 때),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낮에 마시는 술이 편했다. 해가 있을 때 마시면 쫓김이 없어서 그랬는지 기분 좋게 취하는 느낌도 들었다. 더 자유롭고 여유로운 여행지에서의 낮술은 일상에서 마시는 낮술보다도 달았다.


숙소 근처에 낮술 하기 좋은 곳을 미리 봐 두었다. 농가주택을 고쳐 슈퍼와 숙소로 운영 중인 '취하도'. 인스타그램에서 핫해 보이길래 20대 젊은이들이 자리를 먼저 다 차지했을까 봐 오픈런을 했다. 혼자인 나는 안쪽 구석자리에 앉게 될까 싶어 부지런 떨며 서둘렀다. 햇살 좋은 날, 외갓집 앞마당에서 먹는 시원한 맥주 맛! 너무 상상되는 그 맛! 을 즐기려고.


오픈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지만 여기는 자유로운 제주였던가. 마당에 놓인 삼각대를 가지고 20분 정도 신나게 셀카를 찍고 나서야 사장님 부부가 나타났다. 늦어서 미안하다며 쥐포를 맛있게 구워 주신 후 필요한 게 있으면 가게에서 편하게 꺼내 먹으라고 하시고 숙소 오픈 준비를 하셨다. 진짜 '나는 나 너는 너'. 동네 언니 오빠네 집에 놀러 와서 혼자 노는 애 같았다. 오히려 나 신경 안 쓰고 할 일 하시는 게 나 혼자 놀기에 더 편하긴 했다.


파라솔 우산으로 그늘을 만든 평상에 앉아 가게 냉장고 안쪽에서 꺼낸 맥주 한 캔을 마시는 데 생맥주처럼 신선하고 시원함!! 그렇게 쥐포에 컵라면까지 먹으며 혼술 파티를 했다. 틀어 놓으신 라디오를 들으며 330ml짜리 맥주 2캔을 마시고 알딸딸해지자 낮술을 마무리했다. 내가 2시간 동안 마시고, 책 읽고, 셀카 찍고, 놀고 그 자리를 나가기까지 손님은 나 하나였다. 자리 없을까 봐 걱정한 나의 우려는 기우였다지.





제주에서 넷플릭스 보는 거 생각보다 괜찮다.

여행을 오면 부지런해진다. 쉬러 오는 것인데 생각보다 여행지에서 바쁠 때가 많다. 이왕이면 더 많이 보려고, 더 많이 먹으려고, 더 많이 담아가려고 빠르게 움직인다. 아무리 무계획이라도 그렇다. 왜 그럴까? 지나고 보면 오롯이 숙소에서만 느긋하게 멍 때리며 보내는 시간이 더 오래 기억되기도 하는데 말이다.


제주 동부에서 지내는 4일 동안 흐린 날이 많았고 비도 왔다. 자연스레 멍 때리며 오래 기억될 시간이 생겼다. 그날도 오후부터 비가 왔고, 비 오기 전에 사놓은 좋아하는 과자를 꺼내 넷플릭스를 켰다. 이날의 영화는 클래식하게 '노팅힐'.  비 오는 무드에 어울리는 런던 배경의 영화. 몇 번을 봤던 영화지만 제주에서 본 노팅힐은 처음이니까. 빗소리 들으며 노팅힐을 본 그 시간이 평화롭고 여유로웠다.




우연히 만난 기분 좋은 일

동부에서 3박을 하고 남부로 내려왔다. 4박 5일 동안 묵을 숙소에 저녁에 도착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공간이 아니었다. 동부에서 버스 타고 먼 길 오느라 힘이 들어서 그랬는지, 날씨가 흐리고 칙칙해서 그랬는지 심통 부리듯 다 마음에 안 들었다.


"여기 마음에 안 들어. 서울 갈래! 바로 서부로 넘어가고 싶어! "


이 동네, 이 숙소가 마음에 안 든다고 도착한 밤에 친구한테 전화를 걸어 징징됐다. 이번 여행에서 '우연이 만난 기분 좋은 일'이 가장 많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다음 날 아침에 침대에서 무거운 눈만 살짝 떠 고개를 들어 본능적으로 창문을 봤다. 파란 하늘을 보고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바로 이불을 걷어차고 테라스에 나가서 어제와 다른 날씨를 확인하자 입꼬리가 생각보다도 많이 올라갔다. 그리고 모든 게 좋아 보였다. 숙소도 괜찮아 보이고 남부한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거참 이렇게 쉽게 마음이 바뀌다니)


숨은 벚꽃 명소를 찾았다

어젯밤에 택시 타고 들어올 때는 꼬불 꼬불 굉장히 안쪽에 있다고 생각한 숙소가 다음 날 아침에 나가보니 숙소에서 큰 도로까지 걸어서 3분 컷. 그리고 큰 도로에 나오자 너무나 활기찬 벚꽃길을 만날 수 있었다. 벚꽃길에서 연신 사진을 찍으며 생각했다. '어제는 정말 미안했다!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


내가 제주에서 벚꽃 구경을 하리라곤 상상도, 계획에도 없었는데 이렇게 떨어진 꽃잎마저 낭만적인 길을 사람도 차도 많이 다니지 않아 오롯이 내가 독차지하는 기분이라니. 숨은 벚꽃 명소를 찾아낸 기분이라 으쓱했다. 4박 5일 동안 매일 아침저녁으로 나에게 인사를 건네준 고마운 벚꽃 나무들.



어쩌다만난 윤슬 가득 바다와 피크닉

남부에서 매일 2번은 숙소에서 법환포구 쪽으로 이어지는 길로 산책을 갔다. 그 산책길은 좁은 길을 가다 갑자기 등장하는 윤이 나는 바다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파란 하늘에 비친 윤슬 가득한 바다를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마주했을 때 정말 황홀했다. 안 왔으면 정말 후회했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남부에서 매일 산책하다 루틴이 생겼다. 1. 계획 없이 산책하다 근처에 있는 빵집, 카페, 밥집에 들어간다. 2. 빵집에서 빵을 사고 나오고, 빵과 같이 마실 커피를 사러 근처 카페에 가고, (그 카페에서는 다른 곳에서 산 빵을 먹을 수 없으니) 3. 각각의 먹을 것을 들고 법환포구 쪽으로 향한다.


루틴대로 하면 바다 뷰, 구름 둥둥 하늘 뷰가 공짜인 야외 테라스가 기다리고 있다. 기다려서 들어가는 핫한 카페 말고, 줄 서서 먹는 맛집 말고 우연히 만난 바다 테라스는 정말 힐링이었다.



남은 여행을 하러 남부에서 서부로 넘어갈 때 여기서 생일 선물은 다 받은 것 같았다. 남부 도착 첫날 징징됐던 친구에게 말했다.


"남부 좋아. 이 동네 좋아. 다음에 또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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