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 아니고 여백이야
공백 아니고 여백이야.
학교 다닐 때 교수님들이 안식년을 갖는 게 너무 부러웠다. 게다가 1년씩, 거의 해외로 가시는 경우가 많아서 더욱! 하고 싶은 연구도 하고 여유롭게 쉴 수도 있을테니 너무 좋겠다 싶었다. 그리고 나에게 안식년은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안식년(sabbatical year)은 유대주의에서 일주일 가운데 7일째인 안식일처럼 7년에 휴식년을 갖는 것을 말한다. 주로 대학교 교수들이 6년 강의를 하고 7년째 연구년으로 안식년을 가지고 외국에서 연구를 한다.' - 위키백과
위키백과 정의처럼 안식년은 단순히 교수나 연구원들이나 갖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요즘의 정의는 좀 달라졌지. 바이블 키워드의 정의를 살펴보면 '일상 업무를 중단하고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 위해 쉬는 해를 뜻하는 용어'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누구든 안식월, 안식년을 가질 수 있고, 가질 필요가 있다. 나 역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 위해 '쉬는 해'를 갖고 싶었다. 그게 올해가 될지는 몰랐지만, 40살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쉬는 타이밍도 만들기 나름
작년 12월에만해도 돌아오는 해에는 스타트업에서 새롭게 일을 하고 있을 줄 알았다. 10여 년 다닌 회사는 공공기관이었고 주로 공공캠페인 홍보를 담당했었다. 항상 다른 업계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안주했었다. 급여는 적어도 익숙함과 편함을 택했었다. 그러다 자연스레 11월쯤 오퍼가 왔고 기회라 생각했다. 새로 합류할 회사는 분위기도 규모도 분야도 다니고 있던 회사와는 많이 달랐다.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당연히 힘들 거라는 예상도 했지만 더 늦기 전에 '시작하는 회사'에서 나도 같이 성장하며 재미있게 일해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결심과 도전이 필요했고 그 회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입사 전, 그러니까 12월 말부터 새 회사와 커뮤니케이션에서 삐그덕거리기 시작했고 깊은 고민 끝에 내가 생각했던 방향이나 결이 맞지 않겠다는 결론을 냈다. 스타트업계로의 이직이란 결정을 하기도, 그 결정을 다시 무르기까지도 쉽지 않았다. 2월부터 합류하기로 했던 나는 올해를 결국 안식년으로 정했다. 조금은 갑작스러운 결정이기도 해서 쉬는 게 맞는 걸까란 생각이 맴돌기도 했지만 최근 1-2년 사이 마음이 지쳐 쉬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기에 이런 우연들이 ‘지금이 바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 위해 쉬는 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타이밍을 잘 캐치하고 실행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쉬는데 자신감과 용기가 필요한 걸까
막상 '올해는 안식년'이라고 결정을 했지만 어떻게 지낼지 정말 아무 계획이 없었다. 아무 계획 없이 쉰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잘했다. 넌 쉬어도 돼."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기도 했지만 "쉴 자신감이 있다니, 용기 있네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쉼에 자신감과 용기가 필요조건이라는 게 조금은 슬펐다.
1년이나 공백이 있으면 다시 일하는데 괜찮을까. 나이도 많은데 다시 취업이 어렵진 않을까. 이런 걱정들이 없는 건 아니다. 여전히 이따금씩 머릿속에서 튀어오른다. 하지만 멀리 보면 내 인생에서 1년은 정말 짧은 기간이고 그 1년을 쉼의 시간으로 보낸다고 해서 큰일이 일어나지 않을거다. 다만 금전적인 쪼달림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퇴직금에서 야금야금 써보기로 한다.
공백 아니고 여백이니까
나의 안식년의 기간은 '대략 1년'을 생각한거지, 1년이 안될 수도 1년이 넘을 수도 있다. 막내딸이 기간을 정해두지 않고 쉬는 게 내심 걱정스러웠던 아빠는 "언제까지 쉬는 거야?"라고 조심스레 물어보셨고, 나는 "음 올해까지 쉬거나 아니면 모은 돈 다 쓸 때까지?"라고 대답했다. 아빠는 놀라신 듯 했지만 애써 안 놀랜 척 하셨다. 걱정시켜드리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 대답의 반은 진심이었다. 얼마 없는 돈 다 쓸때까지 쉴 수도 있는 거니까. 지금은 그냥 쉬고 싶으니까!!
고정적으로 나가는 돈도 있고, 모은 돈이 많지 않기에 오래 쉬지도 못하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다 보면 적극적으로 일하고 싶을 때가 오지 않을까. 40살에 뭐 먹고 살아야 할지 걱정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백수 라이프를 기꺼이 즐기기로 했다. 공백 아니고 여백의 시간이니까.
나의 안식년이 언제 종료되고 다시 일터로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토질을 회복시키기 위해 경작지를 쉬게 하라는 안식년의 의미처럼 몸도 마음도 더 단단해지는 시간이 되길 스스로에게 바란다.
쉬는 동안 불안함을 떨치기 위한 나만의 작은 규칙은 정했다.
1. 오롯이 24시간을 내 시간으로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서, 먹고 싶을 때 먹고,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을 때 하기. 또 자고 싶을 때 잘 것. 백수만의 특권이니까. 진정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시기니까.
2. 매월 못해본 거 한 가지씩 도전하기
그냥 시간이 흘러가면 하루가 허무하거나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니 가능하면 월마다 한 가지는 안 해 본걸 하자. 나에게는 용기가 필요한 일들도 포함시켰다.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실천 중이다.(도전기는 추후에 글 올릴 예정)
3. 매월 여행 떠나기
당일치기, 1박 2일 등 짧게라도 한 달에 한 번은 여행을 가기로 한다. 평소 좋아하던 장소에 다시 가보는 것도 좋고, 새롭고 낯선 곳에서 즐기고 오는 시간도 좋을 것이다.
4. 나에게 선물하기
백수가 되어 수입이 없어도 나에게 선물은 하고 싶었다. 갑자기 허리 건강을 챙기고 싶어 매트리스를 바꿨다. 결정장애인 내가 쇼룸에 가서 바로 구매 계약을 했다. 폭풍 검색해서 알아낸 아이 방에 둔다는 가습기와 집에서의 시간이 늘어나니까 홈카페를 위한 드립 세트도 샀다. 큰 마음 먹고 피부과 레이저 시술도 받았다(전후 변화 없어서 슬펐지만....).
5. 정리의 시간 갖기
생각정리 말고도 노트북 파일 정리, 가득 찬 핸드폰 사진 정리하기. 시간이 많아지니 집안 가구 배치도 바꿔보고 안 쓰고 쌓아두던 물건들도 하나씩 꺼내보며 버리고 정리한다. 아직 방도, 핸드폰 속 사진 폴더도 어수선하지만 천천히 정리의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얼마 전 매거진 컨셉진에서 진행한 '번아웃캠프'에 참여했었다. 참여자 중 한 분이 스스로에게 남긴 글을 보고 메모를 해두었다. 너무 와 닿아서.
"시간 많다. 괜찮다.
이 봄의 기운을 가득 느껴라.
모든 것은 옳은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