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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주 Feb 23. 2021

할머니의 보행 훈련

지금 이순간부터 이렇게 살고 싶다!

길을 가다 어떤 할아버지를 보았다.


낡은 자전거에 앉아 상체를 앞으로 숙이시고 위쪽으로 올라와있는 왼쪽 페달에 발을 올리고 다른 발을 바닥에 두신. 막 출발하시려는 그 느낌에 주변을 살펴보니 하얀 트럭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차 지나가고 바로 출발하시겠네.' 예상하고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할아버지의 뒤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짙은 군청색에 희고 붉은색 체크로 디자인된 보행기를 밀며 천천히 움직이고 계신 자그마한 할머니셨다. 앞의 할아버지에게 말씀하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길을 보시며 할머니를 돌아보고 뭐라고 뭐라고 대답하셨다. 아시는 어른들이신가 보다 하며 길을 재촉했다. 거리가 좀 떨어져 있어 말씀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아 '동네 친구시거나 동창 뭐 그런 관계일까?' 생각하며 볼일 보러 근처 가게에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길. 가게에서 나와 몇 발짝 떼지 않아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할머니 한 분이 매우 천천히 그러나 당차게 한 발 한 발 내 쪽으로 걸어오고 계셨다. 그리고 할머니의 약 10m 뒤엔 아까 보았던 보행기가 보였다. 걷기 연습을 하시던 중이었던 것 같다. 자세히 보니 할머니께서 자부심과 즐거움으로 이번 회 훈련을 마치고 계신 듯했다.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아까 뵌 할아버지께서 할머니의 보행기 옆에 자전거를 타신 채 응원을 하고 계셨다. 절대 할머니의 런웨이(runway)에 끼어들지 않고 이번 회가 끝날 때까지 꿋꿋이.


짧게 보는 것만으로는 모든 정황을 다 알 수 없구나 싶었다. 아까 트럭이 지나갈 때 할머니의 걷기 훈련을 위해 나오시던 중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 훈련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셨겠지. 약 2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두 분이 연습을 하셨을 것을 생각해보니 할머니의 뿌듯한 미소가 이해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위해 미리 길을 여시고, 또한 지키시고 계셨던 것이다. 한 발은 페달 위에, 한 발은 바닥에 놓고 계셨던 이유를 돌아가는 길에야 알게 되었다. 무척 감동적이었다.


두 분을 눈에 담고 싶어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훈련을 마치고 근처에서 쉬시려는지 어떤 가게 앞에 자전거와 보행기를 주차하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할머니를 먼저 가게로 들어가도록 해주시고 나서 자신은 나중에 들어가고 계셨다.


아는 분들이셨다면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당장 브런치 앱을 켜고 짧게 메모했다.

제목: 자전거 할아버지와 보행기 할머니
부제목:다정한 노부부

멋지고 아름답고 따사롭다


왜 그렇게도 감격했던 걸까? 첫째, 할아버지의 사랑 때문이다. 자전거에 타신 채 응원하시는 모습에서 얼마나 할머니를 사랑하시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훈련을 지지하시는 그 표정이 신뢰에 가득 차 있었다. 휴식을 취하러 들어가시면서도 할머니 먼저 챙기시는 모습은 정말 따스했다. 둘째, 할머니가 느끼는 만족감 때문이다. 연습을 하시는 중에 절대 끼어들지 않고 자신을 신뢰하고 기다려 줄 할아버지를 알고 계셨다. 진정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깊이 사랑받고 계심이 느껴졌다. 셋째, 두 분의 관계 때문이다. 그때 본 장면은 굉장히 단편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짧았던 시간 속에 두 분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조금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배려심 넘치는 태도, 할머니의 자긍심 가득한 미소는 1, 2개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두 분의 인생을 전부 알 수는 없다. 경상도 시골 분으로서 할아버지가 신혼 때부터 다정하셨을지, 할머니가 첨부터 할아버지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았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마에 자글자글 주름이 지고 손에 얼룩덜룩 검버섯이 핀 지금 , 두 분이 보여주신 모습을 통해, 함께하신 긴 시간 동안 분명 평안하고 행복했을 것이라 감히 추측해본다.


오늘, 바로 지금부터 두 분처럼 살아가고 싶다. 두 분의 모습 안에 머물고 싶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나를 통해 그런 여유와 아름다움을 느꼈으면 좋겠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MabelAmber님의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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