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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주 Mar 09. 2021

베스 하먼, 넌 참 좋겠다.

<퀸즈 갬빗>을 보며 독립을 논하다

몇 주 전부터 어떤 여자 애가 체스판 앞에 앉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쓴 빨간 머리의 여성이 나를 보는 태도는 그야말로 뻔뻔함. 마음에 안 들었다. 첫인상이 안 좋으면 더 신경 쓰일 때가 있는데, 그래서인가. 이미 넷플릭스 퀸즈 갬빗 (Queen's Gambit)에 빠져들고 있다.


예고 영상만 보고 주인공 베스 하먼이 꽤 잘 사는 집 출신이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드라마가 시작하면서 예상은 와장창 깨지기 시작한다. 급히 베스를 찾으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 그 소리에 자고 있던 그가 대충 일어나 급하게 옷을 입고 '향수를 마시고' 허둥지둥 체스 경기장에 들어서 뻔뻔스런 얼굴을 하는 건 정말로 황당했다. 귀하게 자란 영애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경기가 시작되려는 찰나, 시청자들은 베스의 과거로 빨려 들어간다.


교통사고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그의 불행은 사실 더 오래된 것이었다. 친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고아원에 맡겨지고 그 이후에 생긴 여러 가지 일들.. 베스의 삶은 객관적으로 많이 어둡다. 그러나 고아원 관리인에게서 배운 체스는 하먼의 생을 책임질 절대적 무기가 된다.



베스 하먼이 부러운 2가지 이유


첫째, 베스와 새엄마와의 관계이다. 

요사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 고민이 많다. 서로 얼마나 이해하고 용납해야 하는지,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은 무엇인지 말이다. 베스는 15살에 극적으로 입양되는데, 입양 직후 새아빠는 새엄마와 베스를 두고 멀리 떠나버린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그곳에 정착했고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알려온다. 그 순간, 체스는 베스와 새엄마를 구원한다. 새엄마는 남편으로부터 버려졌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베스의 매니저로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 베스 역시 자신을 지지해주고 아껴주는 새엄마를 의지해가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서 적절한 부모-자녀의 거리란 어떤 것인가 생각해보았다. 두 사람은 베스가 중학생일 때 만났다. 둘 사이는 혈연관계로 인한 집착이 없다. 마치 친한 옆집 아줌마와 앞집 학생 같은 거리감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늘 유지된다. 그게 나는 참 부럽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엄마에게 집착 비슷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동생이 태어나면서 잃어버린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다시 찾기 위한 나의 수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해주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해줄 거라는 착각은 우리의 관계를 망가뜨렸다. 서로를 용납하지 않았고, 자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애썼다. 나에게는 공감을 잘해줄 엄마가 필요했다. 그리고 엄마에게는 엄마의 규칙을 잘 따라줄 착하고 공손한 딸이 필요했다. 그러나 엄마의 어마 무시한 규칙들을 다 지키지 못했고, 우리는 다투고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 불손하게!'

엄마의 친딸이 아니었대도 과연 그랬을까? 딸이 귀해서 아끼는 것은 이해하지만 우리 엄마 밑에 사는 것은 새장 속 새가 된 것 같았다.


새엄마는 베스에게 매우 허용적이다. 그는 자신의 수양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가끔 청소하라고 하고, 때로 맥주를 가져오라고 한다. 베스가 자신에 대해, 집에 대해 묻는 질문에 거짓말을 하지도 않는다. 친구처럼 대할 뿐이다. 참 부럽다. 이 거리감이 참 좋다. 서로를 간섭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그 거리감! 그런 거리감을 엄마와의 관계에서 늘 바랐나 보다.


둘째, 베스 하먼이 보여주는 자유로움이다.

나는 가끔 너무 쉽게 무너질 때가 있다. 그러나 계획이 좌절되어도 베스는 그것으로 인해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그저 다른 방식으로 성공시킬 뿐. 그가 고아원에서 즐겨 먹던 신경안정제를 새엄마의 약심부름을 통해 다시 발견했을 때, 베스는 1/2씩 빼돌린다. 그리고 잡지를 사지 않을 거면 놓고 나가라는 가게 주인 말에, 신문을 사는 척하며 체스 잡지를 숨겨 빼돌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정해둔 루틴을 다 실천하지 못했다고 좌절하는 나는 아직도 규칙 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엄마가 규칙의 감옥 속에, 오늘의 할 일을 끝내지 못하면 쉴 수 없는 쳇바퀴 속에. 베스는 정신세계가 독특한 여성이다. 베스의 행동은 올바르지 않다. 단지 원하는 바가 조금씩 어긋나거나 계획이 완전히 틀어질 때에도 그걸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는 베스의 모습을 배우고 싶은 거다. 어린 나이에 지역에서 유명한 체스 선수가 되어 승승장구하던 중 새엄마가 갑자기 아파서 1년 동안 간호하느라 체스 경기에 나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체스를 놓지 않았고, 다음 해에 출전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다면 베스 하먼이 이렇게 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독립적이면서도 비뚤어진 이유는 친모와의 관계라는 것이 드라마에서 서서히 드러난다. 그의 친어머니는 수학도였고, 매우 뛰어난 지성을 지닌 여성이었다. 남편과의 사이에 문제가 있어 홀로 베스를 키우고 있었으나, 자신의 정신적 문제로 인해 베스를 놓고 죽어버린다. 죽기 전부터 친모는 베스에게 독립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을 여러 번 당부했고, 그때부터 친모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인 자신이 보기에도 생명이 위태위태한 사람에게 의지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을 테니까.


<퀸즈 갬빗>을 보면서 베스 하먼의 이상 행동에 가끔은 통쾌하고 때로 불편했다. 남자들을 앞에 두고 체스로 승리하는 하먼은 멋지다.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이기고 결승에 오를 때면 함께 흥분된다. 지적인 것을 탐구하는 것, 패턴을 파악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체스 규칙 자체를 알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집에 들이고, 존중하지 않아 떠나게 만드는 걸 볼 때면 안타깝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고아 같은 맘으로 살아온 나를 보는 것 같아 싫다.


부모로부터의 독립은 자식에게서 먼저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부모와 다른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기가 살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나'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자녀들이 각자의 생을 찾아 떠나가도록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퀸즈 갬빗> 시즌 1의 중반까지 왔다. 아직 베스는 사라진 엄마와 아빠들로부터 독립 중이다. 체스에는 고수지만, 인생 게임에는 하수다. 나도 그렇다. 공부는 잘했지만, 삶을 사는 건 그리 쉽지가 않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직장을 그만두면서 나는 엄마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인생을 선택했다. 그래서 무척 행복하다. 계속되는 이야기에는 베스에게도 좋은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 그가 더욱 의미 있고 즐겁게 살아가게 되는 내용이 등장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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