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효주 Jul 04. 2021

그늘이 어두움이 되기까지

[글모사 9기] 주제 2: 관찰

부스스한 눈으로 일어난 효성이 혜정을 부른다.

"엄마, 오늘 아침은 왜 이렇게 조용해요?"

"아.. 음.. 아빠가 어제 못 들어오셨어."

"아빠가요? 왜? 무슨 일 있어요?"

"글쎄 전화로는 조금 일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엄마도 아직 잘 모르겠구나."

"그랬구나. 아침마다 엄마랑 아빠랑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에 잠이 깨는데 오늘은 너무 조용해서 이상해서 깼어요."

"그랬어, 우리 막내. 아침 먹게 형 깨워줄래?"

"네."


그늘이 내린 혜정의 얼굴을 보자 식사하던 진성이 묻는다.

"엄마, 무슨 일 있어요?"

"형, 있잖아. 어제 아빠가 못 들어오셨대."

"그래? 엄마, 아빠 회사에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어젯밤 전화 통화 후에 아직 연락을 못 받아서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 괜찮을 거야. 우리 먼저 밥 먹자."

"그랬군요. 엄마 밤새 못 주무셨겠네요. 피곤해 보이셔요."

"응, 좀. 어서 먹자. 반찬 더 내줄까?"

"아니에요, 이거면 충분해요. 엄마도 더 드세요."

"아니야. 엄마는 밥맛이 없네."

"그래도 한 술만 더 뜨세요. 반도 못 드셨어요."

"응, 엄마 조금만 더 드세요. 응?"

"그럴까, 그럼? 우리 아들들 고마워요."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가고 나서 한참 후까지 혜정은 식탁 의자에 앉아 있다. 식탁 위에는 아침 식사를 하던 그대로 그릇과 숟가락이 놓여있다. 옆집 민수네 아빠 회사도 얼마 전에 부도가 나서 실직했다고 하던데 혹시 남식의 회사에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얼마쯤 지났을까, 도어록 비밀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나더니 철컥 문이 열리면서 현관에 불이 들어온다. 혜정이 급히 달려 나와보니 녹초가 된 남식이 들어온다. 머리에는 밤새 고민하느라 생긴 까치집이 앉았고, 안경은 뿌옇게 되었으며, 넥타이는 풀어헤쳐 대충 걸쳐져 있다. 왼손엔 양복 재킷을 들고, 오른손에는 서류가 가득해 찢어지려는 종이 가방을 든 남식이 구두를 벗다 말고 혜정을 보고 멈춘다.


"여보..."


현관 불이 툭 꺼진다. 혜정이 남식에게 다가자가 다시 현관 불이 들어온다. 주황 불이 얼굴에 어리자 남식의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혜정의 눈에 비친다. 혜정이 남식을 꼭 끌어안았다. 남식이 입을 열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는다. 양복과 서류 가방을 든 채로 혜정을 안았다. 남식의 팔에 힘이 하나도 없다.

"밤새 수고 많았어요. 괜찮아요. 이렇게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아침 드셨어요?"

"....."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아직 아침 설거지를 못했네. 당신 씻고 식사하는 게 좋겠죠? 상의랑 가방 이리 주세요."

혜정이 남식의 손에서 짐을 받아 들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남식이 천천히 따라 집으로 들어온다.


다시 깨끗하게 차려진 식탁. 씻고 난 남식이 반바지에 러닝 차림으로 식탁 의자에 앉는다. 혜정이 프라이팬에서 예쁘게 구운 조기를 그릇에 담아 내 온다.


"여보, 오늘 당신이 좋아하는 조기 구워봤어요. 맛이 어떨지 모르겠네. 한 번 맛볼래요?"


남식이 말을 하지 못하고 끄덕인다. 갓 지은 쌀밥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북엇국을 앞에 놓고, 조기까지 올라왔지만 남식이 숟가락을 들지 못한다.


"많이 시장하죠? 밥 떠봐요. 제가 조기 발라서 올려드릴게요."


혜정이 조기를 집으려 손을 내밀자 갑자기 남식이 그 손을 살며시 잡고 혜정에게 눈을 맞춘다.


"여보... 있잖아. 내가 열심히 밤새 전화하고 알아보고 했는데...."


말을 잇지 못하는 남식을 보면서, 혜정이 자기 손으로 남식의 손을 감싸며 가만히 기다린다.


"그랬는데 다들 많이 어려워서 도와주기가 어렵다네. 지난달에 사업 확장하려고 투자했던 것들이 지금 줄줄이 부도가 나서 우리 회사까지 타격이 커."

"아, 그랬군요."

"응, 그걸 시작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여보, 당시에는 확장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했던 거잖아요. 그때는 잘하신 선택이었어요. 장 사장님네도 힘드시대요? 그래도 그쪽은 융통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을 것 같은데.. 어때요?"

"안 그래도 젤 먼저 연락드렸지. 장 사장님은 도와주신다고 했는데, 그걸로는 해결이 다 안 될 것 같아 걱정이야."

"그렇군요. 옆집 아저씨네 회사도 부도나서 직원들이 대부분 해고되었다 하더라고요. 당신 회사 직원들은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응, 지금 상황이 어떤지 다 알려주었고 부도 위기는 막았지만 전과 같은 상태로 회사를 운영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미리 이직하는 게 좋겠다고 했어."

"그랬군요. 직원들은 모두 퇴사하겠대요?"

"아니, 이런 상황인데도 이제까지 함께 했던 의리로 끝까지 가보겠다고 버티고 있어."

"회사 시작할 때부터 같이 해 온 사람들도 있고, 당신 인품에 회사 온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암튼 장 사장님처럼 나를 믿고 도와주실 분이 몇 분만 더 계시면 괜찮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많이 힘들지 싶어."

"그래서 밤새 못 잤나 보네요. 얼굴이 까칠하고 힘이 없어 보여요. 여보, 일단 우리 조기랑 밥 먹고 또 생각해봐요."


혜정은 먹먹함을 감추고 열심히 조기를 뜯기 시작했다. 남식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느새 혜정의 팔에, 남식의 안경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결국 약속한 기일에 필요한 비용을 다 마련하지 못한 남식의 회사는 부도 위기에 놓였다. 철석 같이 약속했던 장 사장님의 사업체도 큰 타격을 입어 회사는 도산하고 말았다. 경기도의 32평형 아파트에서 살던 혜정과 남식의 가족들은 급작스럽게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할 상황이 되고 말았다. 살던 집을 처분하고 가지고 있던 재산을 털어 몇 명 남지 않은 직원들에게 몽땅 퇴직금으로 준 후, 가족들은 원래 살던 고향으로 내려갔다.


몇 달 후, 혜정의 직장으로 연락이 왔다. 혜정은 결혼 전 간호조무사로 일하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사한 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장애인 시설에 취직을 했던 터였다.

"이혜정 씨, 얼른 전화받아보세요."

"무슨 일로 그러세요? 직장으로는 전화가 잘 안 오는데..."

"전화기가 꺼졌나 봐. 일단 받아봐 봐."

"네, 여보세요."

"엄마, 엄마, 엄마~!!!!!!!"

전화를 받으니 효성이 엄마를 부르며 꺼이꺼이 운다. 깜짝 놀란 혜정이 물었다.

"효성이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효성아, 엄마한테 말해봐, 응?"

"엄마, 엄마. 있잖아.. 있잖아... 아빠.. 아빠가... "

"아빠? 아빠가 왜? 말해봐. 효성아, 응?"

"아빠가 교통사고가 났대. 엄마, 엄마, 어떡해. 엄마, 어떡해."

"아빠가 교통사고.... 가.. 났..."


너무 놀란 혜정이 수화기를 놓치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옆에 있던 이 선생님이 급히 전화를 바꿔 받았다.


"지금 엄마가 조금 놀라신 것 같아요. 아빠 어느 병원으로 가셨대요? 선생님한테 말하면 엄마한테 알려줄게요."

"아, 안녕하세요. 아빠는.. 아빠는... 어... 백병원으로 가셨대요. 엄마한테 백병원으로 오라고 해주세요."

"백병원 응급실? 알겠어요. 효성이 학생도 울음 그치고 천천히 병원으로 가 봐요. 알겠죠?"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급히 연락을 받고 병원에 도착한 진성은 사고로 인해 팔다리가 부러지고 얼굴이 상해 누군지 알아볼 수 없게 된 아빠와 충격으로 쓰러진 엄마가 응급실에 나란히 누워있는 걸 봐야 했다. 순간, 자신이 더 이상 어린 아들이 아니라 가족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학교로 걸려 온 동생의 전화, 사고로 다친 아빠, 정신을 잃은 엄마. 더 이상 투정을 부릴 수도, 기대고 의지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부모님이 나란히 누워있는 침대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진성의 곁으로 의사가 다가왔다.

"저.. 기.. 보호자 되십니까?"

"아, 네. 제가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수술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보호자분께서 동의하시면 바로 수술해야 할 것 같아요."

"아, 제가요...? 엄마는 어떤 상태인지.."

"어머니는 수액을 맞고 조금 있으면 깨어나실 겁니다."

"엄마가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릴 상황이 아닌 거죠?"

"그렇습니다. 일 분 일 초가 급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동의서 주세요."


남식은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면접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4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신호를 무시하고 마구 달리던 트럭이 남식의 차를 뒤에서 들이받은 것이었다. 남식의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졌고, 그 역시 많이 다쳤다. 수술은 잘 끝났으나 회복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거라 했다. 2달간 입원했고 의사는 2달 더 병원에서 치료받기를 권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퇴원하였다. 혜정은 오롯이 남식의 뒷바라지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하루는 혜정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진성이 부엌으로 들어왔다.

"엄마, 저... 대학 포기하려고요."

"응? 진성아, 왜? 이제까지 열심해 해 왔잖아. 이쪽으로 이사 오고 나서 과외 못 붙여줘서 그래? 엄마가 미안하다."

"아니에요, 오히려 이사하고 나서 내신은 더 좋아졌어요. 과외 못해서가 아니라... 제가 대학 가면... 우리 집 식구들은 누가 먹여 살려요..."

"진성아.. 미안해, 엄마가..."

"아니에요, 엄마. 이제껏 엄마랑 아빠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셨는지 잘 아는 걸요. 이제 제가 돈 벌어서 가족들 챙길게요."

"아니야, 엄마가 밤에 일 하나 더 하면 돼. 진성아, 계속 공부해, 응? 너무 아깝잖아."

"아니에요, 엄마. 저도 오래 생각해봤어요. 대학은 나중에 가도 돼요."

"엄마가 너무 미안해. 미안해."

혜정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진성이 혜정의 손등 위에 자기 손을 얹는다.

"엄마, 그렇게 할게요. 아빠는 걱정하시니까 말씀하시지 말고요. 알겠죠? 내년에 제가 말씀드릴게요."

대답 대신 큰 눈을 끔벅이는 혜정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진다.


"엄마, 근데 형 아직도 안 들어왔어?"

"어.. 응.. 아직 안 들어왔네."

"이상하다. 야자 끝나서 지금쯤이면 집에 와야 하는데. 어디 다른 데 갔나?"

"글쎄, 형 곧 오겠지?"

"엄마는 형 걱정 안 돼요?"

"늦게 오면 걱정되지만 엄마는 형 믿으니까."
"피..."


다음날, 학교에서


"효성아, 너네 형 요새 아르바이트하더라. 알아?"

"우리 형이? 아르바이트한다고? 어디서?"

"나 다시는 독서실 총무야. 남학생실. 몰랐어?"

"어.. 응... 나한테는 말 안 해줬는데..."

"아, 그래? 괜히 말했나..."

"아냐, 알려줘서 고마워..."


고 3인 형이, 그것도 공부를 무척이나 잘하는 형이 집에 들어오지 않고 독서실에서 총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은 효성에게 큰 충격이었다. 효성은 친구 명섭이가 다니는 독서실에 따라갔다. 독서실 입구에서 청소하던 형을 발견했다.

"효.. 효성아.."

"형... 대체 무슨 일이야. 왜 여기 있어, 형이?"

"음... 먼저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형 대입 포기했어."

"뭐라고? 왜? 형이 왜?"

"엄마가 낮에는 아빠 돌보시고 밤에 병원 야간 근무까지 하시니까 너무 야위셨어. 코피도 쏟으시더라고. 밤에도 나나 너보다는 엄마가 아빠를 돌보는 게 낫다 싶기도 하고."

"아... 그랬구나.. 형... 난 그런 것도 모르고..."

"미안해, 미리 말 못 해서. 명섭이가 알려줬어?"

"죄송해요, 형. 저는 효성이가 아는 줄 알고.."

"괜찮아. 언젠가는 말하려고 했는 걸. 일단 명섭이 먼저 올라갈래?"

"네, 형. 효성아, 내일 학교에서 보자."

"응, 올라 가. 내일 보자."


그렇게 가정 형편을 알게 된 효성은 자신도 실용음악 학원을 그만 다니겠다고 선포한다. 그러나 알바를 하나 더 해서라도 보내주겠다고 하는 진성에게 못 이겨 계속 음악공부를 이어갔다. 그래서 진성은 낮에 학교를 다니고, 다른 친구들이 야간 자율학습을 할 시간에 독서실 총무일을 하고, 새벽에는 편의점 알바를 하게 되었다.


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많은 시간을 알바에 투자했지만 진성의 벌이는 4 식구의 식비, 그리고 효성의 학원비로 모자랐다. 혜정은 늘 모자란 비용을 꾸러 다녀야 했고, 효성은 학원비를 제때 내지 못해 늘 속상해했다. 그러다 결국 3개월이 채 되지 못해 효성도 음악 공부를 포기하게 되었다. 가족들은 서로에게 상처 내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지만 계속되는 힘든 상황 속에 서로의 마음에 드리우는 어두움을 걷어낼 힘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들의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