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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파걸 Sep 21. 2021

알쓰 직장인, 인생 와인을 만나다

당신의 인생 와인은 무엇인가요?


이 와인은 정말 감동적인 맛이에요!
맛있는 와인을 마셔본 적이 없다면 꼭 한 번 드셔 보세요!

대학을 갓 졸업했을 법한 앳된 여자가 와인 한 병을 들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이걸 어쩐다.. 왠지 비쌀 것 같은데.. 난 그냥 행사 중이길래 저녁 식사 때 분위기 좀 살릴만한 1~2만 원대 와인을 사러 온 것뿐이라고!

매장 직원이 다가왔을 때 뿌리치지 못하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게 잘못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그녀는 보통 매장 직원과는 조금 달랐다.

따로 찾고 있는 와인은 없으니 좀 더 둘러보겠다고 하면 대부분 그냥 자리를 뜨는데,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을 더 이어나갔다. '와인 좋아하세요?'부터 시작해서 본인은 와인이 너무 좋아서 얼마 전부터 와인 수입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까지..

영업을 한다기보다는 뭔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하는 느낌이라 경계심이 조금씩 무너졌나 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와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왔다.


"전 사실 술을 잘 못해서 와인도 딱히 맛있는 거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냥 달콤하거나 예쁜 거 위주로 사게 되더라고요"


그녀는 나를 너무나 안타까운 눈초리로 바라보더니, 이내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어딘가로 급하게 뛰어갔다.

그리고 와인 한 병을 들고 돌아왔는데 그게 바로 지금 이 상황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와인 한 병이 내 인생을 바꿔놓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가 가져온 와인은,


릿지 에스테이트 샤도네이 2009
Ridge Estate Chardonnay 2009

 

라는 미국 화이트 와인이었다.


음? 와인은 프랑스 와인이 유명하지 않은가?

미국 와인은 처음 들어보는데..

왜 하필 화이트 와인이지?

나 호구되는 거 아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감동적인 맛'이라는 말에 이미 나는 절반쯤은 넘어가 있었던 것 같다.

무언가를 먹고 감동을 느껴본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아니, 책이나 영화, 공연까지 다 포함해도 감동을 느껴본 것은 손에 꼽는다.

그런데 와인을 마시는 것 만으로 감동을 느낄 수 있다고? 도대체 어떤 맛이길래?


그래서 일단 가격을 물어봤다.


"이거 얼마예요?"

"네, 9만 4천 원이에요~ 가격대는 좀 있지만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세상에..  와인 한 병에 9만 원이 넘는다니..

나는 지금까지 3만 원이 넘는 와인을 사본 적이 없었다.

어떤 술이건 몇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는 알쓰(알코올 쓰레기)였기에 술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어차피 한 번 마시면 없어질 음료일 뿐인데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살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했다.

수입 맥주는 4캔에 1만 원밖에 안 하는 걸.


하지만 집-회사-집-회사를 반복하는 무료한 직장인에게 '감동'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크게 와닿았나 보다.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와인 한 병'에 9만 원이라고 하면 굉장히 큰돈을 쓰는 것 같지만,

'감동적인 경험'을 하는데 9만 원이라고 하면 꽤 괜찮은 거 아닌가?

내가 돈을 안 버는 학생도 아니고.. 그래, 한 번 속는 셈 치고 도전해보자!

고민 끝에 나는 9만 원이 넘는 그 와인을 샀다.


궁금한 마음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와인을 열고 와인잔에 가득 부었다. 진한 황금빛 액체가 잔에 차오르면서 와인의 향도 같이 진하게 피어오른다.

그런데 그 향은 무척 익숙하면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향이었다.


"어? 이건... 버터???"


그렇다, 그 와인에서 가장 먼저 느낀 향은 부드러운 버터의 풍미였다. 와인에서 이런 향이 난다고? 화이트 와인은 레몬 같은 새콤한 향만 나는 거 아니었나?


와인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와인이 가진 향의 종류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와인의 향은 ‘과일, 꽃, 허브, 향신료, 유제품, 견과류’ 등 여러 가지 카테고리로 나뉘어 있을 정도로 무척 다양한데, 그 안에서 세부적으로 나뉘는 향을 세어보자면 최소 100개가 넘는다.


과일만 해도,


붉은 과일(딸기, 체리, 자두 등)
검은 과일(블랙커런트, 블루베리 등)
감귤류(레몬, 라임 등)
핵과류(복숭아, 살구 등)
열대과일(파인애플, 망고 등)


이렇게 종류가 다양한 데다가


말린, 익힌, 구운, 졸인, 통조림 등 조리법의 차이가 주는 뉘앙스까지 구분하기도 한다.

믿기 어렵겠지만 돌이나 가죽, 휘발유, 심지어 고양이 오줌 향이 날 때도 있다.


더욱 놀라운 건, 이 모든 향이 어떠한 첨가물도 없이 순수하게 포도만으로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캐러멜 향을 입힌 홍차나 커피처럼 와인도 가향(加香)을 하는 줄 알았다.)


포도 품종 자체가 갖고 있는 고유의 향도 있고, 와인을 오크통이라는 참나무로 만든 양조용 나무통에서 숙성시키면 나무에서 우러나는 향과 뒤섞여 바닐라, 견과류 등의 다양한 향이 발현된다. 또한, 와인은 병입 후에도 병 속에서 계속 숙성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버섯이나 젖은 낙엽, 가죽 등의 향이 생겨나기도 한다.


줄곧 버터향만 느껴졌다면 느끼하고 물렸을 텐데, 간간히 느껴지는 신선한 레몬향, 달콤한 파인애플향, 그리고 코를 찌르는 약한 생강향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내 코에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 다채로움이란, 매일 단조로운 모닝빵만 먹다가, 겹겹이 쌓인 바삭한 페이스트리에 달콤한 커드 크림과 잼을 듬뿍 바른 밀푀유를 처음 먹어 본 느낌이랄까?

이 신선한 충격이 나를 와인에 푹 빠지게 한 결정적인 경험이다.


와인에 푹 빠지게 되는 계기는 대부분 이렇게 정신 못 차릴 만큼 매력적인 인생 와인을 만났을 때인 것 같다.

 


너는 언제부터 와인이 그렇게 좋았어?



누군가 이렇게 물어보면, 나는 항상 이 버터향 와인을 만나게 된 날이 떠오른다.


그리고 내 삶에 와인이라는 선물을 가져다준 매장 직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사실 그녀가 소속된 수입사에서 그녀가 나에게 와인을 추천해준 장면을 봤다면 뒷목을 잡으며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욕먹기 딱 좋은 아주 무모한 추천을 해준 셈이니까.


와인을 추천하려면 적어도 상대방의 취향 정도는 물어봐야 했다.

레드 와인을 좋아하는지, 화이트 와인을 좋아하는지.

달콤한 것과 달지 않은 것 중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가벼운 것과 묵직한 것 중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취향을 상세하게 알 수록 만족스러운 추천을 해줄 확률은 점점 높아진다.


그런데 그녀는? 내 취향을 전혀 물어보지 않았고

보편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레드 와인도 아닌, 프랑스 와인도 아닌, 정말 생소한 미국 화이트 와인을 내어왔다. 그것도 무려 9만 원이 넘는 와인을 말이다.


상대방의 취향도 알지 못한 채 인기도 별로 없고, 유명하지도 않은 와인을 골라줬는데 무려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수 십 년 경력을 쌓은 마스터 소믈리에한테도 불가능한 일이다.


왜 그녀는 이런 무모한 추천을 했을까?

그 와인은 딱히 수입사에 미는 인기 상품도 아니었고,

재고떨이라고 생각하기엔 굳이 거창한 '감동'이라는 말을 꺼냈을 것 같지도 않다.

내 짐작이지만 아마도 그녀가 그 와인을 마시고 아주 큰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순수하게 다른 사람도 그런 감동을 똑같이 느낄 거라고 생각하고 추천한 게 아닐까?

진심은 통하기 마련인지 결과적으로 나도 그녀만큼이나 감동을 받았고 말이다.

(물론 무척 운이 좋은 경우이기는 하다. 열에 아홉은 아마 실망했을 것이다. 버터향은 미국 화이트 와인에서 유독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 향을 느끼하고 과하다며 싫어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다.)


무모했지만, 만약 그녀가 다른 판매 직원들처럼 와인을 잘 모르는 내게 취향을 물어보고 가성비 좋은 평범한 레드 와인이나 달콤한 스파클링 와인을 추천해줬다면 이만큼 와인에 빠져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기에 더욱 설레고

가끔은 규칙보다 진심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내 인생 와인은 이렇게 우연히 다가와 '버터 와인'이라는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당신이 만날 인생 와인은 어떤 모습일까?



이전 01화 와인, 삶에 설렘을 되찾아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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